<아트&아트인> ‘The Path, 그가 가는 길’ 김창열

2020.11.02 09:58:24 호수 1295호

물방울과 문자의 만남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갤러리현대가 김창열의 개인전 ‘The Path(더 패스)’를 준비했다. 그의 작품을 더 패스라는 주제로 한자리에 모아 추상미술과 동행해 온 갤러리현대의 반세기 역사를 기념하고,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한 자리다. 
 

▲ Recurrence, 1987, Oil on canvas, 195 × 330cm


김창열은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이다.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정신이 담긴 천자문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쓰고 그린다. 갤러리현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하던 김창열의 개인전을 1976년에 개최했다. 이 개인전을 계기로 파리에서 호평을 받은 김창열의 물방울 회화 작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14번째 전시

그의 작품은 미술계 안팎으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고 동시에 작가의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이후에도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2004년 파리 쥬드폼므미술관 초대전,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설립 등 대내외적 활동에서 갤러리현대와 김창열은 관계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번 개인전 더 패스는 갤러리현대와 김창열이 함께하는 14번째 개인전이다. 2013년 김창렬의 화업 50주년을 기념해 열었던 개인전 이후 7년 만이다. 전시는 물방울과 함께 거대한 맥을 형성하는 문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자는 캔버스 표면에 맺힌 듯 맑고 투명하게 그려진 물방울과 더불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창열에게 문자는 이미지와 문자, 과정과 형식, 내용과 콘셉트,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미적 토대지만, 이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물방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진했다. 


이번 더 패스전에서는 김창열의 작품에 등장하는 문자 속 심오하고 원대한 진리의 세계관이 생명과 순수, 정화를 상징하는 물방울과 결합해 우리에게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

이런 맥락에서 전시 제목 더 패스는 동양 철학의 핵심인 도리를 함축하고 있으며, 평생 물방울을 그리고 문자를 쓰는 수행과 같은 창작을 이어온 김창열이 도달한 진리 추구의 삶과 태도를 은유한다. 

더 패스전에는 김창열의 대표작 30여점이 전시된다.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1975년 작품 ‘휘가로지’를 포함해, 한자의 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형상이 캔버스에 스민 듯 나타나는 1980년대 중반 ‘회귀’ 연작, 천자문의 일부가 물방울과 따로 또 같이 화면에 공존하며 긴장관계를 구축하는 1980년대 말부터 2010년대까지의 ‘회귀’ 연작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출품작의 양상은 층별 전시장에 따라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 ‘수양과 회귀’ ‘성찰과 확장’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심화된다.
 

▲ Recurrence PA1991, 1991, Ink and oil on canvas, 194.5 × 162.5cm

1층 전시장의 주제는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이다. 김창열은 초기 물방울 회화에서 물방울의 특징을 강조하는 빛의 반사효과를 주요 조형 요소로 삼았다. 바탕칠을 하지 않은 거친 마대나 모래, 나무판 등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재료를 사용해 물방울 효과를 강조했다. 

‘휘가로지’는 프랑스 신문 <휘가로> 1면에 수채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린 작품이다. 1980년대 초반 김창열은 신문에 인쇄된 활자를 옮긴 것처럼 캔버스에 한자를 빼곡하게 적는 모색기를 거쳤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해체’ 연작을 통해 온전한 글자를 조각내 의미 없는 기본 획이나 캔버스에 스민 물감자국과 같은 문자의 흔적들을 화면에 등장시켰다. 

인간이 나야가야 할 길
진리 추구와 삶의 태도

지하 전시장에서는 ‘회귀’ 연작의 다채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집중된 회귀 연작에는 물방울과 함께 문자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부각된다. 김창열의 1990년대 작업 양상을 대표하는 회귀 연작은 “문자와 이미지의 대비를 넘어 음양의 철리와 같은 동양적 원천에로의 회귀”(이일)이자 “글자라는 기억의 장치가 물방울이라는 곧 사라져버릴 형상과의 미묘한 만남”(오광수)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문자는 기계로 인쇄한 것처럼 단정하고 규격화된 해서체와 서예의 자유로운 운필 및 회화적 요소가 강조되는 초서체로 등장한다. 해서체가 문자와 이미지의 대립과 긴장을 강조한다면, 초서체는 먹의 농도에 따라 화면에 그물망을 형성하듯 물방울의 배경 역할을 담당한다. 


회귀 연작에서 이러한 시각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캔버스의 천자문은 단정한 해서체로 작품 오른쪽 귀퉁이부터 순서대로 꼼꼼하게 적혀있고 자간과 행간도 모두 균일하다. 반면 한자 위에 그린 무수한 물방울은 글자가 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2000년대 이후 회귀 연작의 또 다른 변화인 다채로운 색감의 도입도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 Recurrence NSI91001-91, 1991, Ink and oil on canvas, 197 × 333.3cm

2층 전시장에서는 김창열이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제작한 회귀 연작 중 먹과 한지를 소재로 한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종이에 글자 쓰기를 연습하듯 한지를 캔버스에 부착하고 여기에 천자문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문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겹쳐 썼다. 

겹쳐 쓰기

기혜경은 그가 한문을 겹쳐 쓰는 작업 방식에 대해 “작가 스스로 동서양의 차별점으로 규정한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 방식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붓글씨를 끊임없이 써내려가는 일은 작가가 자신을 비워내는 성찰과 수련의 과정이면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무념무상의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전시는 11월29일까지.


<jsjang@ilyosisa.co.kr>
 

[김창열은?]

김창열은 1929년 12월24일 평안남도 맹산에서 출생, 16세에 월남했다.

1948년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6·25가 발발해 학업을 중단했다.

1957년 작가들과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갤러리현대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물방울 회화’를 한국에 공개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선재현대미술관, 드라기낭미술관, 사마모토젠조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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