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혼인이 정해진 어느 날 허균이 이달과 누나가 어둠 속에서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마주 잡고 있던 두 사람이 잠시지만 마치 하나가 된 듯이 꼭 껴안고 있는 애틋한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둘의 결합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주잡은 손
“이 시대에 굴복한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겠지.”
이달이 굳이 회피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저의 누나와 합치면 되지 않습니까.”
이달의 한숨이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균아, 그 굴레는 우리 둘 사이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란다.”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바로 너희 가문의 굴레 또한 있지 않겠느냐.”
“저희 집 말인가요.”
“너희 집안에 대한 누나의 굴레 말이다.”
“그렇다면 스승님이 기꺼이 원한다고 해도 저의 누나가 그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라 이 말씀이신지요.”
“네 누나는 이미 그 벗을 수 없는 굴레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를 찾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어.”
균이 이달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렇다면 스승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가요?”
“나의 경우?”
“그러하옵니다. 스승님의 경우도 그 굴레로 인해서 조정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변방에서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이달이 피식하고 가벼이 웃어버렸다.
“재능?”
“스승님의 경우도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이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재질을 갖추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한 신분 제도 때문에 재능을 발휘하기는커녕 멸시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물론 그 친구는 허균의 형인 허봉을 지칭하고 있었다.
허균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전광석화보다 빠르게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 모습을 이달이 놀라기보다는 기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스승님, 옷을 벗은 저의 모습이 스승님과 다른지요.”
이달이 즉답 대신 다시 피식하고 웃었다.
“균아, 한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제도를 옷을 입고 벗듯이 저들 편한 대로 만들어 버리니 문제 아니겠니.”
허균이 벗은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 더러운 제도를 만들었습니까!”
이달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균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이었다.
“균아, 이 조선을 창건한 태조 임금을 알지.”
“물론입니다.”
“그 태조 임금님께서 자신의 적자들을 제치고 왕권을 적자 출신이 아닌 방석 왕자에게 물려주려고 했었던 일이 화근이 된 게야.”
“방석이라면 태종에 의해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이 아닌지요.”
“적자인 자신을 제치고 방석 왕자를 세자로 정하자 태종이 난을 일으키고 결국 방석 왕자와 공신들을 제거했지.”
“그게 이 더러운 제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이달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라는 듯이 다시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방석 왕자를 제거한 태종이 바로 그 더러운 제도를 만드신 장본인이다 이 말이다.”
균이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하오면, 적자 출신이 아닌 방석 왕자가 한때 세자로 책봉 된 일 때문에 태종 임금께서 이 제도를 만들었다는 말씀이신지요.”
자신의 것을 나누려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
매창, 이달의 사연에서 동변상련을 느끼다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의 결과가 바로 네가 말한 더러운 제도가 탄생한 배경이다.”
“하오면 이제 그 제도를 바꾸어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바꾸어야지, 암 바꾸어야 하고말고. 그런데 누가 바꿀 수 있느냐가 문제지.”
“스승님, 누가라니요?”
“인간의 속성이야, 속성.”
“네?”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것을 나누려하지 않아. 썩어 문드러져도 결코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그런데 하물며 권세란 것을 나누어 먹으려 하겠니? 특히 우리 같은 얼자들과 말이야.”
“그러면 정상적이지 못한 방식으로라도 쟁취하면 되는 일이 아닌지요.”
이달이 대답하지 않고 가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방식이라 하셨는지요.”
“그래요,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하였소.”
매창이 힘을 주어 말하는 허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하면서 흡사 어금니를 깨무는 듯했다.
“그러면 제 경우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매창의 눈가로 이슬이 고이고 있었다.
스승이었던 이달은 관기의 자식이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매창의 경우도 관기의 딸이었다.
아마 스승 이달의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로 여기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고 있을 터였다.
“내가 괜한 이야기한 모양이오.”
매창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급히 정색했다.
“아니옵니다, 나리. 제가 괜히 엄한 생각에 빠져들었던 모양입니다.”
“엄한 생각이라고.”
물론 엄한 생각이 아닐 터였다. 비록 허균의 스승인 이달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는 결국 자신의 첫 사랑이었던 촌은 유희경의 또 다른 이야기였다.
촌은 유희경과의 인연은 자신을 애지중지하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결국 이 사회에서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없는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계량이,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 길인고.”
계량이 유희경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리로 쭉 가면 내변산이 나오고 그 안에 있는 직소폭포가 그만이지요.”
“내변산과 직소폭포라.”
“내변산도 아름답지만 그 산 안에 숨어있는 직소폭포는 그야말로 일품이옵니다.”
자신을 투영
“어느 정도기에 나를 그리로 가장 먼저 이끈다는 말인가.”
유희경을 바라보는 계량의 얼굴에 웃음꽃이 정월 대보름날의 달덩이처럼 피어났다.
“기대하셔도 좋을 듯하옵니다.”
계량을 바라보는 유희경의 얼굴 또한 계량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