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2008.12.23 11:54:34 호수 0호

이 책은 2차 대전 중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채널 제도의 건지 섬에서 벌어진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채널 제도는 영국 자치령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동부 해안에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백 년 전부터 독자적인 의회와 화폐를 가지고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2차 대전 중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유일한 영국 영토이기도 하다.
해안선과 구릉들이 빚어내는 독특한 풍광의 건지 섬은 예부터 유서 깊은 관광지이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한동안 머물며 작품을 썼던 집은 환상적인 자연 경관과 더불어 건지 섬의 관광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이 책은 이 아름다운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과 용기, 우정을 유쾌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책이라고는 성경과 사료 설명서 외에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그 사정은 이렇다. 엘리자베스와 이웃들은 독일군 몰래 잡은 돼지를 구워 파티를 벌이고 통행금지 시간을 훌쩍 지나 집으로 돌아가다가 순찰대에게 발각되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독일식 정원’에 관한 독서 토론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는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독서 애호가인 독일군 사령관이 다음 독서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통보를 했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독서클럽을 급조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사랑한 독일군 장교의 아이를 낳은 엘리자베스, 독일군 점령 직전에 손자를 본토로 피신시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는 에벤, 닭과 염소를 키우며 남성용 강장제를 만들어 파는 이솔라, 연정을 품은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워즈워스의 시를 암송하는 크로스비, 먹을 게 없으면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 티스비(‘감자껍질파이’를 만들게 한 장본인). 순박하고 매혹적인 건지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읽고 있노라면, 그들이 소설 속 인물들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건지 섬 어느 모퉁이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은 독일군 치하에 있던 보통 사람들이 끝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고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기지와 유머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리게 한다. 탈출한 소년 노동자를 위하다 수용소로 끌려간 엘리자베스 그리고 홀로 남겨진 그녀의 딸 키트를 보살피는 건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어린 아들을 위해 안쓰러운 연극을 벌이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국군과 인민군이 왜 다투는지도 몰랐던 동막골 사람들의 인정과 순박한 마음을, 건지 사람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기쁨이다. 건지 사람들이 동막골 사람들보다 좀더 영악하지만 그들의 마음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소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휴머니즘은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는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제2의 IMF가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2008년 겨울. 날씨도, 주머니도, 사람들의 가슴도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좋은 책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받고 힘든 시기를 버텨낼 힘을 얻곤 한다.
이 책은 전쟁이 강요하는 억압과 결핍 속에서도 사람들 간의 우정과 연대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끝없는 배고픔, 언제 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고난의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 문학의 힘. 끌려간 친구를 대신해 홀로 남은 아이를 내 자식처럼 보살피는 이웃들의 인정. 그리고 이 모든 무거운 것들을 감싸 안는 유머 넘치는 문장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입가에는 미소가, 가슴에는 따스함이 번진다. 크리스마스 즈음 독자를 찾아갈 이 책에 36.5도의 온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저/ 매직하우스 펴냄/ 1만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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