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미스터리 부부 김광석 & 서해순

2017.10.10 11:40:06 호수 1135호

분노의 돌팔매…마녀인가 마녀사냥인가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경찰이 ‘가수 김광석의 딸 서연양 사망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영화 <김광석>을 통해 김광석의 타살 의혹이 조명된데 이어 그의 딸까지 살해됐다는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현재 두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인물은 김광석의 부인 서혜순씨다.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가 제작한 영화 <김광석>서 김광석 타살 의혹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김광석>은 이 기자가 그의 죽음에 관한 의혹들을 20여년 간 취재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망 당일 기록부터 유족들의 최근 얘기까지 담아내며, 김광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친다. 

한편의 영화로 
다시 떠오르다

이 영화에서는 유력한 용의자로 부인 서해순씨를 지목했다. 지난 8월3일 서울 용산구 용산 CGV에서 열린 언론 시사회서 이 기자는 “탐사보도 쪽 일을 해와서 김광석 자살은 평소 관심을 가져온 사건 중 하나”였다며 “MBC서 다루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건은 공소 시효가 지났다. 진실을 밝히는 유일한 방법은 서해순씨가 나에게 소송을 거는 것”이라고 오히려 상대방을 도발했다.

김광석의 갑작스런 사망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1996년 1월6일 자택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당시 아내와 술을 마셨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목에는 전선이 감겨있었다. 사망 원인은 여자 문제로 인한 우울증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영화는 이 사실을 뒤집는다. 죽은 사람이 남긴 일기를 근거로 아내 서씨가 자신의 고교 동창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그것 때문에 김광석이 괴로워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경찰은 서씨의 진술에 따라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 내렸지만 서씨를 제외한 유족들은 모두 “김광석이 자살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이 기자는 “처음 김광석 아버지는 취재를 만류하셨다. 그러다 돌아가시기 전에 창신동 집으로 불러 녹음테이프를 꺼내주며 ‘취재를 막은 건 (서씨 때문에) 내 아들에 이어 다른 가족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했다.

공개되지 않은 테이프에는 더한 내용도 담겨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외에도 김광석이 사망 직전 지인과 새 앨범을 계획했다는 사실과 누구보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는 점 등을 들어 그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 영화는 서씨가 사망 당일과 이후 진술이 오락가락하다는 점에 집중한다. 또한 그가 과거 범죄 전력이 있고 신분 세탁 뒤 김광석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서해순은 정말 남편과 딸 죽였나  
죽음 둘러싼 풀리지 않는 의혹들

영화는 어디까지나 의혹 제기일 뿐이다. 사건을 뒤집을 결정적 증거는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기자도 인정했다. 

그는 “심증과 믿음은 100%지만 결정적 단서가 되는 스모킹 건이 없다. 1%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1996년과 달리 지금은 인터넷이 있다. 네티즌 수사대의 힘을 믿는다”며 “영화를 통해 집단 양심을 가지고 진실을 밝히고 싶다. 그런 의도서 제작했다”고 전했다.
 

현장에는 두 명의 변호사가 함께 자리했다. 이들은 영화 기획단계부터 법적 부분에 대해 조언을 했다. 작품이 만들어진 후에는 여러 번 반복해 보며 팩트를 체크했다. 

서씨와의 법적 소송에 대해 묻자 한 변호사는 “민감한 사항 가지고 만든 다큐멘터리다. 그래서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언하며 만들었다. 소송에 대한 모든 부분을 염두해 두고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광석 타살 의혹에 이어 그의 딸 서연양도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김광석 유가족 등이 지난 19일 용인동부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는 과정서 드러났다. 유가족들은 지난 10년간 서연양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 용인동부경찰서는 “서연양이 2007년 12월 23일 집에서 쓰러진 것을 어머니 서씨가 발견해 수원의 한 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숨졌다”고 밝혔다. 이어 “서연양이 폐질환을 앓고 있었던 병원 진료 기록이 있었고 부검 결과 폐질환으로 인한 사망이 확실해 변사로 내사 종결했던 사건”이라고 말했다. 

‘딸 잘 있다’
왜 거짓말?

사망 당시 서연양은 16세였다. 서연양은 김광석과 서씨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자식으로 어릴 때부터 발달장애가 있었다. 김광석 사망 후 아내 서씨와 함께 살았고 서씨는 주위에 ‘딸은 미국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연양은 김광석의 음악 저작권(작사·작곡가가 갖는 권리)과 저작인접권(음반제작자 등이 갖는 권리)의 상속자였다. 김광석과 관련 저작권 수입은 서씨와 서연양에게 귀속되고 있으며 전반적인 저작권 관리는 서씨가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서씨는 김광석이 사망한 지 3개월 만에 시아버지를 상대로 저작권 청구 소송을 냈다. 이후 12년 간 법적 분쟁이 이어졌다. 2008년 10월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은 딸 서연이에게 모든 저작권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발달장애’로 금치산자로 지정된 서연양의 경제권은 모두 서씨에게 돌아갔다.  

이에 이 기자는 서연양 사망에 대한 재수사를 촉구했다. 그는 유가족과 함께 지난달 21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서씨를 상대로 고소·고발장을 접수했다. 

유족 측의 김성훈 변호사는 “"서연양의 사망과 관련 경찰 발표, 병원진료 기록 검토와 재조사가 필요하다”며 “서씨가 김광석 저작권과 관련해 벌인 여러 건의 소송서 서연양의 사망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은 고발 접수 6일 후에 해당 사건을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이첩하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이날 서울중앙지검은 “경찰청이 신속한 사건 해결을 위해 수사 인력이 풍부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수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경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광수대로 수사 주체를 변경해 지휘한다”고 밝혔다. 

앞서 검찰은 해당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형사 6부에 배당했다. 또 서씨의 주소지를 고려해 관할 경찰서인 중부서가 수사하도록 했다. 검찰은 서씨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광석의 형 광복씨가 경찰에 출석하며 서씨가 "거짓말로 일관한다"고 비판했다. 광복씨는 지난달 27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출석해 고발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그분(서씨)이 하는 말이 사실과 너무나 다른 거짓이 많다”며 “진실을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조카인 서연양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심경이 어땠냐는 질문에는 “하나밖에 안 남은 광석이 혈육인데 흔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며 “광석이 죽고 나서 미국에 3년 떨어져 있었는데 혼자 얼마나 외로웠겠나. 너무 불쌍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서연양과 왕래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서씨가 보기 싫어 멀리했을 뿐 서연양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서씨는 이런 의혹에 대해 격앙된 태도로 해명했다. 

지난달 27일 CBS <노현정의 뉴스쇼>에 출현한 서씨는 ‘억울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먼저 서씨는 이 기자에 대해 “ 그분이 왜 나를 20년간 쫓아다니고 괴롭히는지 알 수 없다. 왜 국민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건가”라며 “같이 만나서 얘기하자고 말해 달라. 난 잠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해 안가는
해명과 반박

앞서 서씨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서연양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경황이 없어서”라고 답해 논란에 부채질을 했다. 

이에 대해 서씨는 “독일, 미국 등을 돌아다니며 검사를 했다. 그러나 (서연이가) 키도 안 크고 심장도 제대로 작동을 안했다”며 “우리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장애우 키우는 엄마들은 그들이 잘못되면 마음으로 묻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서씨는 서연양의 죽음과 저작권 소송에 대한 의혹에 대해 “서연이 몫(저작권료)이 탐나면 가져가길 바란다. 난 고지만 안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심지어 담당 변호사에게까지 서연양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그런 관행을 몰랐다”고 밝혔다.  
 

서씨는 김광석의 부검소견서를 공개하겠다고도 선언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비난의 시선에 “국가 인권위원회에 제소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날 서씨는 약 30분의 인터뷰 내내 잔뜩 격앙된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심지어 “여자 혼자된 사람을 왜 남자들이 괴롭히는가”라며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새롭게 제기된 가운데 또 다시 세상은 그를 조명하고 있다. 김광석은 싱어송라이터이다. ‘가객’ ‘노래하는 시인’ ‘노래하는 철학자’로도 불렸다.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장이 추서됐다. <사랑했지만>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등 그가 남긴 명곡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사랑 받고 있다. 

<이등병의 편지>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삽입돼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 남성들을 울리고 있다. 군대하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 곡이 김광석 개인에게도 의미가 큰데 그는 군에서 사고사한 형으로 인해 이등병으로 전역했다. 아울러 〈서른 즈음에〉는 2007년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됐다.

그녀가 입 열수록 의문 꼬리
해외 행적까지 추가로 드러나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 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돼 350m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명소가 됐다. 

김광석은 1964년 1월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전업사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창신동(현재는 종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 서울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대광고등학교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서 공연을 시작했다. 1984년 ‘12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해 활동했다. 

1985년 1월 입대했으나 군 생활 중 큰형(김광동)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해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한다. 1987년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했다. 1989년 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놨으며 이후 1991년에 2집, 1992년에 3집을 발표했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했다. 

검찰 재수사
과연 결과는?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 각각 발표했다. 1991년부터 학전 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꾸준히 공연했으며 1995년 8월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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