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비껴간 충청대망론 흑역사

2017.05.08 10:49:56 호수 1113호

역시나 들러리로 끝났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새 정권이 대한민국을 이끌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시작된 이번 대선 레이스는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중 하나가 ‘용두사미’로 끝난 충청대망론이다. <일요시사>는 1960년대부터 이어지고 있는 충청 출신 대선주자들의 흑역사를 정리해봤다.



충청대망론은 충청 출신 대통령을 배출하고픈 지역의 열망이자, 이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다. 역대 대통령 중 대망론을 달성한 사람은 제5대 윤보선 대통령이 유일하다. 충남 아산 출신인 윤 전 대통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물러나자 자유당을 밀어내고 집권한 민주당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당시는 의원내각제였다. 실권은 대통령이 아닌 총리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대망론이라고 할 수 없다.

끊긴 대망론

더군다나 윤 전 대통령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이듬해 3월 대통령직서 내려왔다. 박정희 군부독재의 시작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하야 후 다음 대선에 연이어 출마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정치인은 김종필(JP) 전 총리다. JP는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등장해 정권 2인자로 군림하며 이름값을 올렸다.

정치적 입지를 다진 JP는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다. 개헌으로 치러진 첫 직선제였다. 그러나 직선제는 오히려 그의 대권가도를 가로막았다. JP는 충청권의 약세를 실감하며 4위에 그쳤다. 대중에 명실상부 충청의 맹주로 각인됐지만,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3당 합당의 대주주로 나서며 대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1990년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총재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민주당) 총재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손잡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탄생시켰다. 내각제 개헌을 통해 대권을 잡으려는 JP의 노림수였다.

그럼에도 JP는 철저히 2인자에 머물렀다. 노 전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을 외치던 JP 대신 대통령제를 주장한 YS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서열서 밀려난 JP는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 총재가 된 그는 이념적 차이가 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했다. 이른바 DJP 연합이었다.

호남-충청의 힘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DJ는 JP를 정권의 첫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JP는 인사권을 행사하는가 하면 국민연금 등 국가 주요 정책서 권한을 사용하며 실세 총리로 군림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에서 DJ와 갈등을 보였고, 결국 총리직을 사퇴했다.

YS·DJ 정권서 JP는 철저히 2인자에 머물렀다. 이는 충청이 가진 정치적 취약점을 대변했다. 영남의 YS와 호남의 DJ는 충청 지역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 JP와 손을 잡은 측면이 강했다. 적어도 충청은 그렇게 진단했다. 자민련 창당 후 치른 15대 총선에서 JP가 꺼낸 ‘핫바지론’은 이러한 자괴감의 표출이었다.

윤보선이 마지막, JP·회창도 역부족
기문·희정·운찬에게 기대 걸었으나…

JP에 이어 충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정치인은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이회창 전 총재였다. 황해도 서흥서 태어났지만, 부친 및 선대의 고향이 충남 예산이어서 대망론의 주인공으로 분류됐다.

법조인이던 이 전 총재는 청렴·원칙의 대명사로 불리며 유력한 대선주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 역시 순탄치 않은 정치 역정을 경험한다. 첫 도전인 1997년 대선에서 DJP 연합에 석패했다. 같은 충청 출신인 이인제 전 의원에게 충청 표가 일부 넘어간 게 결정적이었다.

2002년 대선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청 행정수도 공약에 안방을 내주며 무너졌다. 2007년 세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났다.

19대 대선은 충청 입장에서 숙원을 풀 절호의 기회였다. 반기문, 안희정, 이인제, 정운찬 등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모두 대선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주목받은 사람은 충북 음성 출신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었다. 귀국하기 전 그는 각종 여론조사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문재인 후보보다 앞선 지지율을 보이며 충청의 숙원이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귀국 후 지역의 열망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각종 구설로 지지율이 하향 곡선을 그린 것이다. ‘정치 교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캠프 내에서 알력 다툼이 발생하는 등 내부 단속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다른 후보의 네거티브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현실 정치의 벽을 실감한 것이다. ‘조카의 국제사기 사건’ ‘박연차 23만달러 수수 의혹’도 그를 괴롭혔다. ‘충청-영남 연합’으로 대권에 도전하려던 그의 계획도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반 전 총장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출마 선언 3주 만에 백기를 들었다.

반 전 총장은 물러났지만 대망론이 끝난 건 아니었다. 충남 논산 출신의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주목받았다. 문 후보의 강력한 대항마로 가능성을 보인 안 지사는 충청이 가장 주목하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안 지사는 부족한 조직에도 선전을 이어갔다. 민주당 경선이 본격화되자 개인적 인기를 선보이며 지지율 20%를 웃돌았다. 확장성 면에서 문 후보보다 낫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문 후보의 ‘대세론’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민주당 경선서 석패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됐다.

다음 기회로…

반 전 총장, 안 지사의 중도 하차로 주목받은 사람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였다.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그는 방향을 잃은 충청 민심을 수습하며 대권을 노렸다. 민주당 김종인 전 대표,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 손잡고 부족한 조직을 보완했다.

그러나 문 후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힌 그는 ‘통합정부’라는 차선책을 선택, 주연이 아닌 조연을 택했다. 마지막 주연 후보가 인막의 뒤안길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결국 충청은 본선 주자 0명이라는 성적표에 만족하며 다음 대선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대선 이끈 충청 인사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선대위에서 활동한 충청 인사의 면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재인 선대본부 종합상황본부 실장은 대전의 대표적 ‘친문’인 박범계 의원이다. 같은 대전의 박병석 의원은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을 총괄 지휘했다.

안철수 선대위의 대표적 충청 인사는 김세환 대전 서갑 지역위원장이다. 그는 선대위 공보단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대전 대덕특구 기관장 출신인 신용현 의원은 여성위원장으로 여성 정책을 총괄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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