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최순실 게이트> ⑧최태민 여성편력 보고서 공개

2016.11.04 13:42:44 호수 0호

목사 맞아? 이 여자 저 여자…문란했던 성생활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최근 최순실과 관련된 이슈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최씨의 부친 최태민씨의 과거 행적에도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최태민 보고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 보고서는 최태민씨의 비위사실, 여자관계, 이권 개입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는 문서다. 과연 이 보고서는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을까?



최태민 보고서는 1979년 10월23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직접 올린 문건으로 최태민씨의 비리와 비위 사실을 적나라하게 적시한 문건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의미가 적지 않다. 보고서에는 최씨에 대한 구체적인 비위 사실, 여자관계, 이권 개입 등의 사례와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열돼 있어 정보기관의 보고서임을 감지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미주한인신문 <선데이저널>이 최초로 보도했으며 2007년 대선 당시 이해찬 전 총리가 공개하기도 했었다.

실시간 미행 흔적
시간별 보고 형식

최씨는 1975년 박근혜 대통령에게 3차례에 걸쳐 ‘고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그는 첫 만남서 교계의 난맥상을 개탄하며 구국선교를 역설, 박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한구국선교회를 설립하고 전국의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 최대 300만명의 단원을 확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씨는 이 단체가 조직된 이후 14건의 횡령, 사기, 변호사법 위반, 권력형 비리, 이권 개입, 융자 브로커 등의 비위 행각을 했던 것으로 보고서에 적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직접 친국(親鞫)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은 최씨의 생식능력을 없애는 것과 청와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 모두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어떻게 잘 넘어갔는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를 맡는 등 10·26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이 보고서에는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최씨의 출생, 성장배경, 경력,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된 과정, 구국여성봉사단 창설 이후의 부정행위 의혹, 여성 추문 등을 A4지 16장 분량으로 상세히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씨는 1912년 5월5일생(1979년 당시 67세)이며 원적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34번지, 본적은 경남 양산군 웅상면 삼호리 532번지, 주소는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689-25번지로 돼 있다.

보고서가 소개하는 최씨의 특이사항은 그가 7개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은 최도원(崔道源)에서 이후 최상훈, 최봉수, 최퇴운, 공해남, 방민, 최태민으로 변천했으며 호적 이름 개명도 최소 1번 이상이었다.

중정 보고서는 박 대통령을 만나기 직전까지의 최씨의 이력도 자세히 기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씨는 1927년 3월 황해도 재령보통학교를 최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졸업했다. 이어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황해도경 고등과장인 서포의 추천으로 ‘황해도경 순사’로 재직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월남해 최상훈이라는 이름으로 강원도경 소속 경찰이 됐다. 이어 1947년 3월 대전경찰서 경사, 1947년 4월 인천경찰서 경위(사찰주임)가 됐다가 1949년 6월, 1950년 7월엔 각각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해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일한 것으로 돼 있다.

비서부터 여군 국장까지 파트너로
복잡한 여성관계 적나라하게 묘사

6·25전쟁 때인 1951년 3월, 최씨는 군에서 나와 최봉수라는 이름으로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부산)으로 활동했다. 1954년 초 부인 김제복(63)과의 가정불화로 경남 동래군 금화사로 도피 후 삭발하고 최퇴운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됐다.

1955년 그는 비인가 학교인 경남 양산군 개운중학교의 교장,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한국복지사회 건설회(임의단체) 회장이 됐다. 불교계에 인맥을 쌓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63년 5월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1965년 1월 천일창고(주)를 운영하던 최씨는 같은 해 2월15일 서울지검에 ‘유가증권 위조’ 혐의로 입건, 약 4년간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1969년부터는 천주교, 불교, 기독교를 결합한 종교활동을 본격화했다. 같은 해 초 천주교 중림성당서 영세를 받았고 이어 1971년 10월엔 서울 영등포구 방화동 592-7번지 호국사에서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복합한 영세계 교리 ‘영혼합일법’을 주장했다.


또한 방민이라는 이름으로 독경 및 안찰기도를 했다고 한다. 최씨는 1974년 5월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122-16 박모씨의 집에 전세로 들어와 ‘태자마마’를 자칭했으며 1974년 8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54-5 선모씨 소유 빌딩 2층(36평)으로 이전, 동일한 행위를 했다고 보고서는 기록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와 이 수사보고서엔 ‘자칭 태자마마’ ‘사이비 목사’ ‘사기’ ‘횡령’ ‘이권 개입’ ‘회계’ ‘부정행위’ ‘최태민’ ‘구국봉사단’ ‘추문’ 등 구체적 용어나 표현이 무수히 겹쳐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이후 작성된 ‘항소이유보충서’에서도 아래와 같이 최태민 문제가 밝혀져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 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 본부에서 한 조사 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시간 장소 인물
구체적으로 서술

보고서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최씨의 여성편력에 관한 내용이다. 보고서에는 최씨가 70년대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 사무총장, 부단장, 부총재, 비서 등 구성원들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성행위 시간, 장소, 과정, 횟수 등까지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아래는 보고서에 적혀있는 여자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1972년 12월부터 1976년 4월까지 27세 전 총재비서와 영등포 옥호불상 여관, 세검정 옥수장, 신촌 신성여관 및 대전 시내 에덴여관 등에서 전후 10회 성교, 1976년 1월부터 4월까지 총재실서 주 3회 정도 포옹, 키스 등 애무행위.

1975년 8월부터 1975년 12월까지는 45세 전 부총재와 총재실서 수시 키스, 포옹 및 애무하고 여성의 손으로 음경을 만지게 하는 등 음란행위. 1976년 4월부터 1977년 5월까지 31세 전 부단장과 세검동 옥수장 (방갈로), 신촌 신성여관 등에서 3회에 걸쳐 성교하고자 했으나 성기 불발기로 실패. 1976년 3월 41세 전 여군 국장과 영등포 금성호텔 302호실서 성교하려다 성기 불발기로 음경을 빨게 하는 등 음란행위.

총 성행위 시간
과정·횟수까지

1976년 8월부터 1976년 9월까지 40세 간호과장과 총재실서 4회에 걸쳐 키스, 포옹하고 음경을 빨게 하는 등 음란행위. 1976년 8월부터 1977년 6월까지 24세 병원 경리담당과 총재실서 4회에 걸쳐 키스, 포옹, 유방 및 음부를 만지면서 강제로 음경을 빨게 하는 등 음란행위.


42세 전 사무총장은 최태민으로부터 검찰에 피소된 자신의 사기 사건 선처 조건 등으로 스스로 몸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거절할 경우 해임 등 보복이 두려워 1978년 5월14일, 사직 공원 옆 옥호미상 호텔에서 최태민의 성기 불발기로 국부와 유방을 빨면서 손가락을 국부에 삽입, 음란행위.

35세 유부녀 사무총장과 봉사단 기획관리실장 및 건물관리 실장실서 중요 업무회의를 가장, 문을 잠그고 음란행위 또는 호텔서 통정. 이때 이 여성은 정조 제공으로 최태민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도산에 직면한 남편의 경영업체를 최태민의 지원으로 회복.

51세 과부 조직국장과 조직국장실 또는 호텔 등에서 통정설. 25세 전 비서와 총재실 또는 호텔 등에서 통정설. 42세 제2대 서울지구 시단장에게 남편 공천문제로 접근해 총재실 또는 호텔 등지서 통정설. 43세 전 사무총장 남편이 대학 운영자임을 기회로 접근, 총재실 또는 지방출장 중 호텔 등에서 통정설.

중앙정보부가 직접 작성
박정희 “거세하라” 지시

이에 대해 당시 최씨 측은 병실 입원 도중 강압적으로 이뤄진 수사와 기록이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도 1990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서 그를 옹호했다. “저와 새마음운동을 하던 최(태민) 고문은 시기를 받았다. 투서가 들어오니까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조사를 시켰다. 아버지(박정희)는 내사 기록을 읽어보고 저를 배석시킨 가운데 친국(직접조사)을 한 뒤 없었던 일로 돌린 적이 있다. 최 고문에 대해 떠도는 항간의 루머를 믿지 않아주시기 바란다.”

<월간중앙> 1993년 11월호는 당시 분위기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지역에서 열리는 구국봉사단이나 새마음봉사단 행사에 참석하면 관내 각급기관장과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중앙부처 고위공무원, 국회의원들이 총출동했다고 전했다.

“측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태민 총재의 위상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나중에 최태민씨는 도지사와 경찰국장을 전화로 호출해 호통을 칠 정도까지 되었다.”

10·26 뒤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났다. 최씨가 박 대통령을 자신이 만든 대한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이 단체는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석연찮게 변신했다. 그리고 이를 통한 권력 남용으로 최씨 주변엔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가 들끓었다. 하지만 이 의혹들은 실체가 덮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합수부도 그를 수사했지만 밝혀진 건 없었다.

이후 최씨는 1980년대 당시 박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었던 육영재단서도 권력 남용으로 안팎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90년, 최씨는 박 대통령의 퇴진과 함께 전면서 물러났다. <중앙일보>는 1994년 최씨의 부음을 전하며 “최씨는 최근까지 근혜씨의 생활비를 대주며 재산관리인 행세를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31일 <국민일보>에 따르면 19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최태민씨와 교계 활동 및 교류를 해온 전기영(78) 서산 충성전원교회 목사는 “최태민·박근혜 연인설에 대해 최씨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최씨는 ‘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신의 부부가 아니다’고 말한 걸 들었다”고 설명했다.

<국민일보>는 전 목사가 항간에 떠도는 최씨의 육영수 여사 현몽 이야기(육 여사가 자신의 꿈에 나타나 박근혜 영애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얘기)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7번 이름 바꾸고
3가지 종교 결합

전 목사는 “최씨가 현몽에 대한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 데 이어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내가 육 여사의 표정과 음성으로 빙의했다’고 말했다”면서 “최태민이 내게 말하길 ‘육 여사 빙의에 박근혜가 놀라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육 여사가 내 입을 빌려 딸에게 나(최태민)를 따르면 좋은 데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박근혜는 입신(入神·신들림)한 상태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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