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이정현을 보며 신수근을 생각한다

2016.10.18 15:41:51 호수 0호

조선왕조실록 영조 51년(1775) 8월 기록이다.



『임금이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4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은 포은(정몽주)과 충의가 같다”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

영조가 고려시대에 정몽주가 있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신수근이 있어 자랑스럽다고 했다. 아울러 그에게 믿음의 지존이라는 의미의 신도(信度)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런데 정몽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데 반해 신수근이란 인물은 생소하다.

그 사유는 이외로 간단한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데 반해 신수근은 표면상으로 살피면 한 개인, 그것도 조선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군에게 충성한 것으로 살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수근의 이면을 살피면 단순히 연산군 개인에게 충성한 게 아니었다. 하여 그 진실을 알게 된 영조가 사우를 만들어주고 또한 편액까지 하사한다. 그 사연을 살펴보자.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이며 중종의 장인(단경왕후의 아버지)이었다. 흘낏 살피면 신수근의 처지가 참으로 곤란하리란 사실이 한 눈에 살펴진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으니 말이다.


이 과정서 신수근이 보인 처신을 살피면 그가 지향했던 충성의 의미가 드러난다. 먼저 반정이 일어나기 2년 전 일이다. 우의정 강귀손이 신수근을 방문해 누이와 딸 중 어느 쪽이 더 소중한지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연산군과 진성대군(중종) 중에서 선택하라는 말로 그 의미를 헤아린 신수근은 오로지 명석한 세자(연산군의 장남 이황)를 믿겠다고 대답했다.

신수근이 연산군 개인에게 충성을 다했다면 이 사실을 고해야 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고변하지 않고 홀로 마음속에 감췄다. 본인 역시 장인과 처남 등 처가 일족이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연산군의 폭정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반정에 앞서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이 다시 신수근에게 반정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내가 이미 연산군을 임금으로 섬겼는데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보위에 올리는 일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내 목을 베라.”

이 대목서 신수근의 충의 본질이 잘 드러난다. 폭군이지만, 한번 임금으로 섬겼는데 결코 그를 배신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구로 일관한 사실은 연산군의 폭정과 반정의 필요성을 동시에 인정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반정의 정황을 살피면 바로 입증된다. 반정 10여일 전 이미 연산군도 그를 알고 있었다. 하여 그 유명한 장녹수와 전비에게 목숨 보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정도였다. 아울러 반정이 있던 날 연산군 곁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신수근은 반정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산군에게 고하지 않았고 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 일은 단지 그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그의 일족, 아울러 그 딸의 운명(대역죄인의 딸로 폐비됨)까지 뒤바꾸어버리는 일이었음을 알고 있던 그의 충성은 단순히 연산군에 대한 마음으로 보기보다는 한 인간의 의리 차원에서 바라봄이 바람직하다 사료된다.

신수근의 행적을 살피며 자신의 주군인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정세균 국회의장이 의원직을 사퇴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설쳐댔었던 이정현의 실체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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