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 故 최고은 죽음 통해 본 ‘시나리오 작가’ 세계

2011.02.15 11:03:02 호수 0호

‘5타수 무안타’ 내 글은 언제쯤 빛을 볼까…


단편 영화 <격정소나타>의 감독 겸 연출을 맡았던 최고은 작가가 지병과 생활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최씨의 소식은 영화계 종사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가슴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빛을 보지 못한 신인 작가라지만 어떻게 이런 형편에까지 몰리게 됐는지 <일요시사>는 시나리오 작가 세계에 대해 조명해 보았다.

고 최고은 작가 생활고로 생 마감…열악한 처지 ‘충격’
영화계 구조적 문제가 촉망받는 작가 죽음으로 내몰아



최고은 작가는 지난 1월29일 경기 안양 석수동의 월셋방에서 이웃 주민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사인은 생활고로 인한 것이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기 안양시 만안경찰서 측은 최씨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다가 수 일째 굶은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최씨는 재학 중인 2006년 12분짜리 단편 <격정 소나타>를 선보여 평단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했던 평단의 찬사는 그의 생활고를 덜어주지는 못했다. ‘5타수 무안타.’ 장편 시나리오를 다섯 편이나 썼지만 단 한 편도 영화로 채택되지 못한 작가 최씨가 자신을 향해 던진 말이다. ‘어떻게 해야 내 시나리오가 빛을 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하지만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을 땐 잠을 이룰 수조차 없다.

신인 작가 시나리오
채택은 ‘기적’

신인 시나리오 작가 A씨는 “이틀 밤을 새워도 단 한 줄이 안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간신히 시나리오를 완성해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돼야 돈을 받을 수 있는데 신인 작가의 시나리오가 채택되는 건 기적에 가깝다.

글이 신선하긴 하지만 오히려 너무 때가 묻지 않아 상업 영화의 장벽을 뚫을 수가 없다. 더구나 요즘에는 감독이 직접 자신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게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한 영화 관계자는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 많기도 하고 ‘제작비 거품을 줄여보자’는 얘기가 나오면서 너무 특정 부분에만 희생을 강요한 면이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감독이 직접 쓰고 스타 작가만 각광받다 보면 신인 작가가 설 땅은 거의 없다. 이러다 보니, 한 때 유망했고 각종 상을 휩쓸었던 작가도 서서히 힘이 빠지고 결국 작가라는 이름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신인 시나리오 작가 A씨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고 밤에 글을 쓰는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최씨 같은 생활고는 비단 소수의 일이 아니다. 1000만 관객이 드는 한국 영화시장과 연예인은 수십억의 출연료를 받아가지만 영화나 방송 모두 제대로 된 수익 분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씨의 한국예술종합학교 후배는 영화 제작사의 횡포를 폭로했다.


지난 8일 오후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한 네티즌은 ‘그동안 정말 말하고 싶었다. 영화 제작사의 횡포’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다. 자신을 최씨의 같은 과 학교 후배라고 소개한 이 네티즌은 “영화계에서 느낀 서러움과 화가 한꺼번에 터진다”는 분노 섞인 표현으로 글을 시작했다. 최씨의 후배는 최씨가 겪은 생활난에 대해 언급했다. “최고은 선배님, 아마 자신의 첫 시나리오 계약 후 엄청난 꿈에 부풀어 오르셨을 겁니다. 정말 열심히 쓰셨을 겁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돌아온 건 계약금 중 일부인 몇 백만원 정도가 고작이었겠죠”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표시했다.

“제대로 된 대접
못 받으며 일한다”

캐스팅과 투자가 확정되어 영화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제작사는 작가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는 기약도 없다. 그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이 제작사를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미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몇 백만원 정도의 계약금 일부만을 받고 언제 영화가 시작돼 나머지 돈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최씨가 생활고에 시달리고 병이 악화됐다는 것이 이 후배의 주장이다.

그는 “선배의 죽음이 물론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분명 선배가 속해있던 사회 구조의 문제가 더 컸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네요. 감독과 배우들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이들을 욕해선 안됩니다. 제작사와 투자사가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많은 분들이 부디 이 어려운 현실을 알고 영화를 즐겨주었으면 좋겠네요. 여러분이 보시는 한국의 모든 영화들, 이렇게 제대로 된 대접도 못 받으며 뒤에서 일하는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몸 바쳐 만드는 영화입니다”는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최씨의 후배는 자신의 지인 B씨가 겪은 억울한 사연을 상세히 소개했다. B씨는 작년에 미남 주인공이 출연해 흥행한 영화의 스태프로 일했다고 한다. 그 영화의 동원 관객수는 600만이 넘는 수치로 이 후배가 예상하기에 “100억 정도의 수익이 났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최씨 후배 “영화사 백억 벌어도 몇백” 횡포 밝혀
좋은 영화의 시작은 시나리오…영화 발전 밑거름


B씨의 사연은 이랬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제작사는 B씨에게 3달에 800만원을 주겠다고 하며 계약을 권했다. 하지만 몇 주 뒤 갑자기 말을 바꾸더니 4달로 연장하자고 했다. B씨는 1달은 봐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같은 돈에 계약을 했다. 하지만 촬영이 길어져 6개월로 늘어났고, 추운 겨울날 밤을 새고 일을 했지만 야근수당 등 초과 업무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이를 참지 못한 스태프들이 제작사에게 기간연장에 대한 추가계약을 요구했지만 제작사는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라. 다른 애들 뽑아서 돈 주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태프들은 제작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행여 제작사의 눈 밖에 나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촬영이 끝나고 800만원을 받은 B씨는 기술스태프라서 많이 받은 것이지 일반 연출부나 제작부는 800만원의 절반도 받기 어렵다.

편당 회차를 놓고 일정 부분의 급여가 정해진 조명, 카메라 등의 스태프와 달리 작품의 성패에 따라 수익이 판가름 나는 작가들의 고충은 극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화노조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들이 생존을 위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즈음인 2000년도의 연평균 소득은 337만원, 2009년도에는 623만원으로 조사됐다. 10년 전과 비교해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월급으로 치면 52만원이 채 되지 않는 액수로 여전히 최저생계비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신인 시나리오작가들이 영화 한 편당 받는 개런티는 보통 1500~2000만원이다. 이들은 총 개런티 중 극히 일부인 300~500만원을 받고 시나리오를 넘긴다. 잔금은 제작에 들어가야만 받을 수 있는데,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가 많아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게 영화노조 측의 설명이다.

임금체벌·계약위반에
다른 직종 찾아 떠나기도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꾸다 지금은 방송작가로 전업해 지상파 방송사에서 근무 중인 K씨는 “유명 작가의 막내작가로 일을 하면 한 달에 2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일자리도 없지만 어렵게 구하더라도 하루 종일 커피 심부름, 워드 작성 등의 잡일을 하다가 지쳐서 대다수가 그만두게 된다”고 작가의 실상을 전했다.


K씨는 이어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과 일에 대한 애정이 없이 돈만 보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며 “드라마나 언론 보도를 통해 화려하게만 보여지는 작가의 삶은 극소수의 일이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수의 작가지망생들은 꿈을 펼치지 못하고 애초에 마음을 돌려 다른 직종을 찾아 떠나게 된다.

구두 계약 관행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작가들은 영화 제작사와 계약을 맺을 때 구두로 하는 게 관행처럼 돼있다. 이를 악용해 제작사가 나중에 임금을 체불하거나 처음 계약내용을 위반해도 속수무책이다. 그래도 한때 우리 대중문화의 자양분이었다는 자부심과 언젠가는 내 글이 빛을 볼 것이란 희망을 안고 오늘도 밤을 지새우는 작가가 전국에 1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좋은 영화의 시작은 바로 좋은 시나리오이다.

한 영화 관계자는 “훌륭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도록 작가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결국 한국영화 발전에도 밑거름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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