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나의 첫 여인은 창녀였다

2016.06.16 09:20:21 호수 0호

최근 집창촌(집단 창녀촌, 성매매 집결지) 양성화에 대한 찬반 논쟁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한 여인의 주장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녀의 변을 들어보자.

그녀는 “집창촌이 없어진다고 해서 성매매가 없어지고 사회가 더 깨끗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매매는 음성화되고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며 “집창촌을 양성화해 성매매 여성의 자립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재차 언급했다.

말 자체로는 그럴싸하게 여겨지는데 참으로 어리둥절하다. 이를 주장하는 여인이 지난 2000년 서울 종암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창녀를 우리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부각시켜 관내 집창촌(일명 미아리 텍사스촌)을 없애겠다고 그야말로 성매매와 전쟁을 벌여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던 바로 그 여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의 혁혁한 활동을 바라보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었다. 그녀의 무모할 정도로 담대한 행동의 종착역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필자의 예측대로 후일 정치권에 입문하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나 패배의 잔을 마시고 물러서고 만다.

여하튼 지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창녀촌 양성화가 바람직한지 여부에 대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현명한 판단을 유도하고자 창녀들과 부딪히며 살았던 우리 세대, 아니 필자의 경험을 실례로 들어 풀어 나가보자.

먼저 우리 세대와 정상적인 성관계의 의미를 살펴보아야겠다. 당시 사회통념에 따르면 결혼 전 성 관계는 금기였다. 성관계는 성인 여부를 떠나 결혼한 남녀들의 전유물이었고 반드시 결혼이 수반되었다.

혹여나 양가 부모들 사이에 혼인을 굳게 약조한 경우라도 결혼 전 성관계는 엄격하게 제한되었을 정도다. 정상적인 가정의 젊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여곡절 끝에 성관계가 성립된다면 그는 곧바로 결혼으로 연결되어져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세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주체할 수 없는 기운 또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어떻게 풀어야했을까. 그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결국 창녀일 수밖에 없었고 나 역시 그 방식을 선택했다.

첫 경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그 무렵이었고 그를 시발점으로 대학생 시절, 또 군에 입대해서 휴가를 얻으면 잠시 짬을 내어 찾고는 했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회수는 1년에 한번 정도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 여자 친구들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와 관련 쓰라린 경험을 실토해야겠다. 당시 한 여자 친구와 데이트 중에 통행금지에 걸렸고 결국 허름한 여인숙에서 함께 밤을 보내야했다.

그날 밤 나는 차마 그녀를 범할 수 없었다. 당시의 사회통념이 나를 굳건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 대신 당시까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그날 내 입으로 뱉어내놓은 모든 미사여구는 그 다음날 먼지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그녀를 범하지 않은 나의 행위를 내가 자신과 결혼할 의향이 없어 그런 것이라 판단내리고 나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오래전에 스쳐지나갔던 창녀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는 가볍게 미소 짓는다. 그 창녀들이 없었다면 곁에 함께 했던 여자 친구들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과연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겠느냐의 문제다.

절대적이라 강변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필자는 창녀촌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개선하여 양성화하는 길이 바람직하다고 조심스럽게 결론 내린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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