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아트인> '공간의 순례자' 서양화가 윤정선

2014.12.29 12:13:42 호수 0호

과거를 되불러오는 그림의 힘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지난 24일부터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는 서양화가 윤정선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엠볼리움'. 엠볼리움(간극)이란 연극 상영 도중 막간의 진행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펼쳐지는 짧은 공연을 뜻한다. 윤 작가의 그림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삶 곳곳에 숨어 있는 엠볼리움을 발견한다.



긴 시간의 흐름 동안 묵묵히 역사를 목격한 사도회관이 서정적인 풍경화로 관객 앞에 펼쳐진다. 윤정선 서양화가는 건물이 지닌 기억의 이야기를 엠볼리움이란 전시로 풀어냈다.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외관과 바로 양 옆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은 그림 속 공간을 연극무대처럼 보이게 한다.

그림을 연극무대처럼

주로 빈 공간을 통해 작품의 모티브를 얻는 윤 작가는 의도된 연출로 화면에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 일가견이 있다. 윤 작가의 작품을 보면 지금 막 연극의 한 세션이 끝난 것처럼 고요하다. 누군가가 무대 뒤편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다음 세션의 막이 열리면 배우가 들어설 것 같은 장면도 있다.

그간 윤 작가는 유화와 아크릴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엠볼리움에서는 아크릴을 자제하고 유화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색이 더해지며 특유의 깊은 맛을 내는 유화의 강점을 빛의 대비를 활용해 극대화한 것으로 보인다. 야경을 위주로 한 공간의 표정과 적막으로부터 연상되는 상상의 내러티브는 한 작품에 녹아있다.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이전 작품보다 크기 면에서 대형화된 것이 눈에 띈다.

윤 작가의 삶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곳을 찾아 떠돈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하계훈 미술평론가의 평론을 인용하면 순례의 궤적은 작가가 열었던 몇 차례의 전시회를 통해 그림 속에 기록됐다. 윤 작가는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으로 조형수업을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때의 경험은 윤 작가에게 대체 불가한 무형의 자산처럼 남아있다.


역사 목격 사도회관 서정적 풍경화로
유화 강점 빛의 대비 활용해 극대화

윤 작가는 명동성당 언덕부근에 자리 잡은 사도회관을 이번 작품의 무대로 선택했다. 오래된 벽돌 건물에 해가 저물고 밤이 내려온 모습은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한 감성을 전달한다. 몇 해 전부터 윤 작가는 야경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단순한 우울감이 아닌 밤이라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무드에서 오히려 상쾌한 호흡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윤 작가는 작업실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소통의 단절을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귀가 시간에 인적이 드문 야경에서 사물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밤의 이미지는 차분한 명상의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여러 일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제까지 윤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주변을 들추는 것에 관심을 뒀다. 유학 시절에는 런던의 거리와 북경의 자금성이 매개로 쓰였다. 한국에선 고궁과 북촌 부근의 오래된 집들이 캔버스로 들어왔다.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담긴 이야기를 담으려했다. 그 작업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윤 작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도회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며 관광 명소로 불리는 명동 한복판에 있다. 그림 속 사도회관은 소란스럽고 번잡한 주변 분위기를 바꿔놓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사도회관에는 조선 말기 천주교 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했던 숨결, 순교자들의 기도, 전쟁 폐허 위에 남겨진 소시민들의 애환이 중첩된 이미지로 쌓여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민주화항쟁도 주마등처럼 스친다.

자유로운 상상

사도회관을 마주한 화가는 연극배우도 되고 동시에 관객도 되면서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과거를 되불러오는 힘을 가진 연극적 공간의 힘이다. 작가의 상상 속에선 늘 차원을 넘나드는 엠볼리움이 펼쳐지고 있다. 엠볼리움전은 올 30일까지 진행된다.

 

<angeli@ilyosisa.co.kr>

 

[윤정선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영국 브라이튼 대학교 순수미술 석사과정 졸업
▲중국 칭화대학교 미술학 박사과정 졸업
▲개인전 퓨전갤러리(2000) 관훈갤러리(2004) 모란갤러리(2005) 금호미술관(2006) 영은미술관(2014) 등
▲그룹전 타이난 문화예술회관(2004) 가나아트센터(2005) 인천시립미술관(2006) 인사아트센터(2007) Heiqiao Studio(2009) 등
▲수상경력 제1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1996), 금호 영아티스트 선정(2004), 제24회 석남미술상 수상(2005), 송은미술대상전 선정(2007·2009), 소마미술관 아카이브 등록(2012)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2014) 등
▲작품소장 대전지방법원홍성지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금호미술관, 용인인터컨티넨털 리조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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