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머신 대부' 정덕일 롤러코스터 인생

2014.09.22 10:44:35 호수 0호

'파친코 왕' 허망하게 잠들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슬롯머신 대부'로 알려진 정덕일씨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정씨는 한 시대를 풍미한 '파친코 왕'으로 1990년대 6공 최대 스캔들인 '박철언게이트'를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정씨는 지난 15일 자택에서 호흡에 이상을 느껴 병원으로 후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슬롯머신 대부 정덕일씨의 빈소가 서울순천향대병원 VIP실에 마련됐다. 평소 지병이 없던 정씨였기에 빈소를 찾은 지인들은 그의 허망한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형 덕진씨와 함께 슬롯머신 사업으로 권부의 핵심에 이르렀던 그는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돈 쓸어 담아

'음지'에 있던 정덕일이라는 이름은 1993년 '양지'에 알려졌다. 정씨는 같은 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되며 '슬롯머신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죽는 순간까지 정씨는 슬롯머신의 대부란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과거 정씨가 자신의 사업을 확장시킨 배경은 이렇다. 1980년대 중반까지 슬롯머신 업소는 허가받은 일부 호텔에서만 영업이 가능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슬롯머신 업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93년 당시 79개 업소가 서울에 문을 열었고, 전국적으로는 330여개의 업소가 새로 생겨났다고 한다.

문제는 이처럼 우후죽순 번지는 슬롯머신 업소를 제재할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다는 점이다. 사정당국의 단속 의지도 없었다. 사행성 조장, 승률조작, 탈세 등의 우려에도 사정기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슬롯머신 업자들은 이들 사정기관과의 '검은 공생'으로 국내 슬롯머신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데렐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정씨의 형 덕진씨다. 덕진씨는 주먹세계의 신흥강자로 군림하며 슬롯머신 업소 9곳을 운영했다. 호텔도 5개나 갖고 있었다. 돈냄새를 맡은 조폭들은 덕진씨와 한 배를 탔다. 이들은 덕진씨의 호텔을 기점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슬롯머신 업소가 호황을 맞으면서 덕진씨와 '파친코 왕' 정씨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당시 이들 형제에게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유력 정치인 및 사정기관 고위 관계자가 정씨 형제를 비호하고 있다는 루머가 확산됐다. 실제로 영화배우 신성일씨가 쓴 회고록 <청춘은 맨발이다>를 보면 정씨의 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신씨는 1987년 지인의 주선으로 정씨를 만난 뒤 친형체처럼 가까워졌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정씨는 서울 석촌호수 맞은편에 뉴스타 호텔을 지었다. 정씨의 사업은 실패를 몰랐고 급기야 그는 신씨에게 스폰을 제안했다.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그렇지만 신씨는 "영화를 하고 싶다"며 거절했고, 그럼에도 정씨는 선뜻 1억원의 수표를 건넸다. 1990년대 초반 정씨는 노태우정권 최고 실세였던 박철언 의원을 소개해달라고 신씨에게 부탁했다. 신씨는 자신의 경북고 후배인 박 의원을 정씨와 만나게 해주었다.

신씨는 정씨에게 1987∼1993년까지 모두 40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돈은 모두 영화제작에 쓰였다는 것이 신씨의 주장이다.

이처럼 '파친코 왕'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자금을 사회 각계각층에 살포했다. 자신들을 외풍에서 막아줄 비호세력을 찾은 것이다. 정씨가 쓴 돈은 일종의 '공작금'으로 이해됐다. 정씨가 무차별로 뿌린 돈에 사회고위층이 중독됐다. 자타공인 6공 2인자였던 박 의원도 검은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검은 돈의 뿌리는 깊고도 단단했다.

재기 준비하다 자택서 심장마비 돌연사
6공 최대 스캔들 '박철언 게이트' 주역

그의 화려한 전성기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철퇴를 맞았다. 1993년 김 전 대통령은 사정당국에 '거악 척결'을 지시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의 홍준표 검사(현 경남도지사)는 정씨를 비호한 조폭, 정치인, 검찰 등에 대한 사정작업을 벌였다. 권력층은 긴장했다. 슬롯머신 사업권을 둘러싼 로비에서 자유로웠던 정치인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심지어 정씨의 큰형 덕중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자신이 직접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상황이었다. 정씨는 1992년 당시 대선후보였던 YS의 선거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 생전 정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YS가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줬다"며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씨 일가는 YS가 휘두른 매서운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일격을 당한 셈이다. 정씨 일가 입장에선 '대통령이 되도록 도왔는데…'라는 원망이 나올 법도 했다.


검찰 수사에서 정씨 일가는 관료와 정치권 등 사회 권력층이 대거 연루된 게이트의 꼭대기에 이름을 올렸다. 요샛말로 '정덕일 리스트'가 수사대상이 된 것이다.

작심한 홍 검사는 정씨 형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정씨가 전날 검찰에 자진 출두 의사를 밝혔는데도 호텔을 급습해 기어이 체포했다. 검찰은 정씨가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5억원이 담긴 007가방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박 의원에게 전달한 사실 등 각종 비리 혐의를 밝혀냈다.

최초 박 의원은 금품수뢰 혐의를 부인했지만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등 권력층 인사가 줄줄이 구속되면서 수사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끝내는 정권 '넘버2'인 박 의원도 철창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후 홍 검사는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세를 탔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돈을 건넨 정씨는 저 유명한 '플리바게닝'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박철언 게이트' 이후 정씨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소위 잘나가는 연예인들까지 대거 동원해 군 위문공연을 다녔다는 정씨는 유착했던 정관계에서 영향력을 급격히 잃었다. 신씨 등 연예인에게 수억원이 넘는 용돈을 건넸던 위세도 잠시, 정씨는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2000년대 들어 정씨는 제주도 모 호텔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며 '카지노의 대부'로 자리하는가 싶더니 최근 투자실패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카지노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300억원 규모의 제주도 부동산을 '경매사기'를 당해 헐값에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기를 꿈꾸던 정씨는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검은돈' 뿌려

정씨의 빈소 앞에는 정관계와 연예계 인사들이 보낸 근조화환이 빼곡했다. 그러나 정씨의 유족들은 취재진의 접근을 철저히 막아섰다. '음지'에서 꽃폈던 정씨는 결국 '양지'로 돌아오지 못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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