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3대째 가업 잇는 만리동 이발사 이남열

2014.06.09 10:24:16 호수 0호

이건희 회장 불쑥 찾아와 “다듬어주세요”

[일요시사=경제2팀] 박효선 기자 = 서울역 뒤편 만리동 시장 골목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이발소가 있다. 하얀 글씨의 ‘성우이용원’ 간판은 오랜 세월을 버텨내고 있다. 그 안에서 이발사 이남열(65)씨가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사각사각 사각 사각’

성우이용원 안에서 들려오는 날렵한 가위 날이 스치는 소리. 이남열 이발사가 가위를 쓰는 소리는 경쾌했다.

무딘 삶을 깎는다

“왜 이발 일을 하게 됐냐고? 먹고 살기 바빴지 선택하고 그런 게 어딨어. 그리고 해본 일 중에 이발이 가장 정직한 기술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때는….”

이씨가 전통이발사의 길을 택한 이유는 생존 때문이었다. 성우이용원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처음 문을 연 후 이씨가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87년째 이씨의 외할아버지부터 아버지를 거쳐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우이용원의 이발요금은 수년 째 변하지 않았다. 이발소 안에 걸린 요금표에는 ‘조발(컷트) 1만원. 면도 9000원. 세발 3000원. 드라이 5000원. 중고생 컷트 8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손님은 하루에 10명만 받는다.

방금 들어온 손님의 머리에 이씨는 감자 가루를 발라 얼마만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가늠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손에 익은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이씨는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목수가 대패 날을 갈고, 주방장이 칼을 쓰고, 양복쟁이가 가위를 다루듯, 이발사는 가위와 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그게 이발사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이씨의 손을 떠나지 않은 연장은 그의 손에만 달라붙는다. 이씨가 사용하는 빗은 30년이 넘었다. 자신이 정복한 4∼5종류의 가위로 이씨는 손님의 머리카락을 다룬다. 이씨는 “지금 쓰는 가위도 20년 정도 내 손가락에 맞췄다”며 “아무리 비싼 가위를 써도 기술 없는 사람이 쓰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가위의 날은 얇고 날렵했다. 가위 날을 제대로 가는 법을 알기까지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날을 단순히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자를 수 있게 갈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날 이씨는 연장을 갈지 않았다. 좋은 기운을 받는 날 연장을 갈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는 “연장을 갈려면 내공에 기가 빠지면 안된다”며 “그 정도로 내가 예민하다”고 웃었다.

이발이 끝나자 이씨는 손님의 뒷목과 구레나룻에 거품을 칠했다. 이씨는 “(거품을 내는 데 쓰는 솔은) 말꼬리로 만들어진 스위스산”이라며 “이게 오래됐어도 거품이 잘 나고 바를 때 부드러운 데 반해 요즘 나오는 솔들은 이렇게 빳빳하다”고 설명했다.

감각 익히는 데 35년 걸려
“아직 후계자 없어 걱정”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면서 첨단미용기계가 넘쳐나지만 그는 여전히 아날로그의 삶을 추구한다. 휴대폰이 없는 그는 자신의 ‘아날로그 기술’ 철학에 대해 털어놨다.

“정전이 되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해. 다들 기계에 의지하니까. 그런데 나는 상관이 없어. 비가 오고, 전기 나가도 나는 손님이 오면 이발할 수 있거든.”

장인이발사가 생각하는 잘된 이발이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머리다. 이씨는 “3개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머리가 잘 깎은 것”이라며 “그걸 깎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전통이발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거 성공하는 데 35년 걸렸다”며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깎을 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씁쓸해했다.


기본을 추구하는 전통 이발만이 가능한 기술이라는 설명이다. 이씨는 왼손의 힘을 강조했다. 오른손의 가위질을 받쳐주는 왼손 힘 조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의 왼손은 가위를 잡는 오른손보다 자주 아프고 고되다.

그는 경지에 오른 자신의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관리에도 철저하다. 이씨는 “35년 동안 담배 피우고, 고기도 먹었지만 이제 모두 끊었다”며 “지방질을 먹으면 손이 떨리는 걸 스스로 느낀다”고 말했다.

이발 기술에 대한 집념으로 인생을 쏟아 부은 이씨에게는 아직 후계자가 없다. “배울 놈에게만 가르칠 거다. 여기 들어오면 정신부터 가다듬어야 한다”고 그는 엄포를 놓았다.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된 청년들에게 이씨는 따끔한 충고를 날렸다. 그는 “서울대? 카이스트? 아무리 좋은 대학교 나오면 뭐하냐”며 “남의 종노릇을 하거나 남들 머리 짓밟고 올라서려고 그렇게 공부들을 하느냐”고 꼬집었다. 그는 “작은 가게를 하더라도 사장이 낫다”며 “단돈 100만원을 벌어도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장인을 대우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이씨는 거듭 강조했다.

대기업에서 영입과 체인점을 열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이씨는 모두 거절했다. 그는 “체인점을 하면 돈 있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아무리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고 해도 자본주의 논리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이때 이발을 마친 손님이 일어섰다. “아이고 개운하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서울 약수동에서 왔다는 그는 5년째 단골손님이다. 그는 “다른 데서는 머리를 빨리 깎아줘도 한 달만 되면 금방 달라지는데 여기서 깎으면 한 달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다”며 자리를 떴다.

정재계 거물들 단골손님
“누구든 오는 순서대로”

전통이발을 그리워하는 정재계 인사들도 성우이용원을 다녀갔다. 거물급 인사들도 이씨에게서 이발을 받으려면 세면대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지난 2011년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이씨의 이발소를 찾았다. 이씨는 “그 양반(이건희 회장) 밤에 조용히 이발하러 온 적이 있다”며 “한 신문에 나온 사진을 보고 찾아왔다면서 ‘덕분에 오랜만에 전통 이발을 하고 가오’라는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고 회상했다.


노회찬 전 의원 또한 이씨의 오랜 단골손님이다.

그러나 성우이용원에서는 유명 인사들도 이씨에게는 머리카락을 자르러 온 손님일 뿐이다.

이씨는 “기업 회장이든 국회의원이든 교수든지 간에 여기 오면 모두 순서대로 이발 한다”며 “누가오든 머리스타일만 본다”고 말했다. 

이어 머리를 다듬기 위해 새벽열차를 타고 거제도에서 올라왔다는 한 중년남성이 순서를 기다렸다. 성우이용원에는 서울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머리를 깎기 위해 찾아온다.

왼손의 경지

이발소 거울 한쪽에는 시인이라는 한 단골손님이 쓴 시가 걸려 있었다.

‘만리동 언덕길 / 세월의 더께로 / 메마른 몸을 비튼 성우이용원…빛바랜 추억 사이로/ 세월이 흐른다.’

정지된 시간이 흐르는 이곳, 성우이용원에서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남열씨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깎는다.  

 

<dklo21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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