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추석 보낸 사람들<사연>

2009.10.06 10:15:28 호수 0호

취업 못해 결혼 못해 “명절싫다 싫어~”

오매불망 기다렸던 추석연휴도 끝이 났다. 짧은 연휴나마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낸 이들은 명절증후군도 견딜 만하다. 그러나 가족, 친지들과의 만남이 스트레스로 남은 이들도 있다. 추석 내내 잔소리와 차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이다. 몇 년째 취업을 못한 백수,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어버린 노총각·노처녀, 아기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불임부부 등이 그들이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도는 이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일가친척 모이는 명절 때마다 극에 달하는 스트레스 “짜증나”
“왜 결혼 안 하니” 잔소리에 고향 안 가는 노총각 노처녀 급증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이모(37·여)씨는 지난 추석 먹은 눈칫밥이 아직도 소화되지 않은 기분이란다. 만나는 가족, 친척마다 언제 결혼할 거냐는 잔소리를 하는 통에 불편하기만 한 연휴를 보냈기 때문이다. 반년 만에 만난 부모님은 올해도 혼자 고향에 내려온 이씨에게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보였다고 한다. “이번 추석에도 신랑감 데리고 오지 않을 거면 고향에 올 생각도 하지 마라”는 경고를 받고 내려왔던 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공격의 강도는 거셌다.



“아직도 싱글이야?”
따가운 시선에 가시방석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사촌동생의 결혼소식은 이씨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고 한다. 친척들은 “동생도 결혼을 하는데 넌 뭐가 모자라서 결혼을 못 하느냐. 너무 눈이 높은 것 아니냐”라는 속 모르는 말로 이씨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친척들의 말대로 이씨는 모자랄 것 없는 골드미스다. 높은 연봉에 30대 후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 활발한 성격까지 갖췄다.

그러나 화려한 조건도 세월 앞에선 무릎을 꿇게 된단다. 귀찮을 만큼 대시를 해오던 남자들도 어쩐 일인지 3년여 전부터는 뚝 끊겨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 할 정도라고. 이씨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몇 년 전 같으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나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며 “예전엔 부모님이 선을 보라고 하면 극구 거절했는데 이제는 내심 선 자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이렇다 보니 설이나 추석 등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은 이씨에게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다. 특히 결혼을 해 명절날 볼 수 없는 또래 여자 친척들의 빈자리를 느낄 때나 남동생과 사촌동생의 부인이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볼 때면 위기감은 극에 달한단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도 외로움만 커진다는 게 이씨의 심정이다.

결혼 스트레스로 명절이 두려운 미혼남녀는 적지 않다. 이씨처럼 가족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예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이들도 많다. 결혼정보회사 가연이 미혼남녀 4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48.1%, 여성의 50.9%가 ‘결혼은 언제 하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싫어 홀로 추석을 보낼 거라고 답했다. 스트레스로 명절을 망칠 바에야 외로운 연휴를 보내는 게 낫다는 계산에서다.

회사원 정모(39)씨도 난생 처음 혼자 명절을 보냈다고 했다. 이번만큼은 매해 되풀이되는 스트레스를 피해보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에게는 일과 신종 플루를 핑계로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거짓말을 한 그는 추석특집영화와 맥주로 연휴를 홀로 보냈다. 정씨는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는 것이 도리가 아니란 건 알지만 더 이상 반복되는 잔소리는 듣기 싫다”며 “다음 설까지는 어떻게 하든지 신부감을 만들어야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불임부부들 역시 명절이 곤욕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시댁식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 며느리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맛있는 명절음식을 먹어도 돌 씹는 기분이라 소화제를 챙겨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결혼 6년차인 직장인 김모(34·여)씨도 어김없이 힘든 명절을 보냈다고 토로했다. 김씨 부부는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기지 않아 못 낳는 불임부부다.

처음 3년간은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터라 임신이 되지 않은 것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아이를 재촉하는 시어머니의 전화 횟수가 잦아졌고 김씨도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결국 그녀는 지난해 남편과 함께 불임클리닉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편과 자신에게 별다른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과는 달랐다. 김씨에게 다낭성난소증후군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것. 임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난소에 포도송이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 임신이 쉽게 될 수 없는 병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시댁식구를 만나는 것이 고역이 돼 버렸다. 특히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명절은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이라고.

지난 설에도 친지들에게 근심어린 시선을 느꼈던 김씨는 추석이 다가오면서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지난 추석, 어김없이 시어른들은 앞치마를 두르기 무섭게 아이 이야기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죄인 아닌 죄인이 돼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김씨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한다. 부엌에서 술안주를 내 오다 “쟤는 언제 아이 가지려고 저렇게 천하태평이니”라는 등 가족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남의 이야기 듣듯 자리에 앉아있던 남편도 그녀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속 모르는 친척들은 “너무 돈 버는 데만 집착하는 것 아니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얼른 낳아서 키워라”는 등의 말들을 던져 표정관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한다.

“차라리 입양이라도”
가슴에 못 박힌 명절

김씨처럼 많은 불임부부들은 지난 추석, 일가친척들과 한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불임전문병원에 따르면 불임치료 시술을 명절에 맞추는 부부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고향에 가지 않을 만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를 보면 불임부부들의 심리적 부담감과 스트레스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불임부부 중 더욱 고통스런 명절을 보낸 사람은 단연 아내 쪽이다. 불임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아이를 못 낳는 부부에게 시댁식구의 눈총은 대부분 며느리에게 쏠리게 마련인 탓이다. 이들 불임부부가 명절날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은 다른 부부의 임신소식이다. 축하해 줘야 한다는 생각은 굴뚝같지만 표정이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여기에 친척들이 자신들과 비교라도 하면 상처는 걷잡을 수 없다고 한다.

취업 못한 백수·백조도 가시방석 연휴 보내 명절증후군 극심
아기 못 낳는 불임부부도 걱정하는 가족·친척 잔소리에 스트레스


3년째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는 최모(32·여)씨는 몸도 마음도 모두 불편한 설을 보냈다고 토로했다. 동서가 만삭인 터라 동서의 몫까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끔 던지는 동서의 푸념 섞인 말들은 최씨의 마음을 헤집어 놓기 충분했다. 최씨가 불임치료를 받는 사실을 뻔히 아는 동서가 “우리 언니를 보니 애 낳고 나서는 아무것도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기 낳기 싫어져요”라는 말을 한 것.

그녀는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아이를 못 낳았다는 자격지심에 무척 서러웠다”고 전했다. 이들이 지난 추석 상처를 받은 또 다른 하나는 생각 없이 내뱉는 가족들의 말이다. 걱정을 해준다고 건네는 말들이 결국 비수가 되어 꽂힌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이 가장 상처를 받은 말은 “노력해도 안 되면 입양하는 게 어떠니”라는 말. 과거에 비해 입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나 자신의 아이를 얻으려고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하는 이들에게 입양은 가슴 아픈 선택이니만큼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밖에도 “무자식이 상팔자다” “아이 없으니 육아비, 교육비는 안 들어 좋겠다”는 식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들도 있어 여러 가지로 명절은 곤혹스런 시간이라는 것이 불임부부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언제 취직할래?”
잔소리에 독서실행

몇 년째 취업을 못한 백수, 백조들에게도 명절은 달갑지 않은 날이다. 매일 매일이 연휴인 이들에게 추석연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간일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과 친척들의 걱정 어린 시선과 잔소리를 듣는 것에 익숙해진 백수들도 참기 힘든 순간이 있다. 이는 가족들 가운데 취업에 성공한 사람이 있는 이들에게 찾아온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째 취업공부를 하고 있는 서모(30)씨는 두 달 전 취업한 여동생으로 인해 더욱 눈치 보이는 추석을 보냈다. 가족이며 친척들은 모두 여동생의 취업을 축하하기 바빴고 자격지심에 서씨의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 하는 수 없이 친척들을 피해 독서실에서 몇날 며칠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서씨는 “조카들에게 용돈도 줄 수 없는 신세란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며 “취업하기 전까지는 매번 이런 명절을 맞을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아예 고향에 가지 않고 취업공부에만 매진한 취업준비생들도 적지 않았다. 노량진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김모(29)씨는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는 대신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고향에 간 고시원 총무를 대신해 며칠 동안 총무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데다 친척들의 걱정을 듣지 않을 수 있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향 행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백수들은 이번 추석에도 많았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구직자 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251명의 구직자가 추석에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구직자들이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라는 답변으로 34.3%의 구직자가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들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주기는커녕 차비조차도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구직 실패로 가족, 친지를 만나기 부담스러워서’가 25.5%,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기 위해’ 16.7%, ‘혼자 쉬고 싶어서’ 9.2% 순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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