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병역비리 실태

2009.09.22 09:51:39 호수 0호

진단서 한 장이면 병역면제 ‘뚝딱’

신종 병역비리가 등장했다. ‘환자 바꿔치기’란 기막힌 수법을 이용해 병역면제 등을 돕던 일당이 적발된 것.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병역 기피자들을 모집한 뒤 미리 섭외해 둔 희소병환자의 진단서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병역을 면제하거나 축소하는 것을 도왔다.

4년여 간 이 방법으로 병역비리에 가담한 이들은 40여 명. 이들 가운데는 부유층의 아들, 카레이서 등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병역비리 수법은 끊임없이 진화해 근절대책을 비웃고 있다.

희소병 환자 진단서 이용해 병역비리 저지른 일당 덜미
인터넷으로 병역기피자 모집해 수천만원 받고 비리 알선


허술하게 신분확인을 하는 일부 병원의 허점을 이용해 병역비리를 저질러 부당이득을 챙긴 일당이 덜미를 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환자를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현역 입영대상자를 공익근무나 면제 판정을 받도록 해준 혐의(병역법 위반)로 병역비리 브로커 윤모(31)씨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결과 윤씨는 지난 2006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인터넷 게시판에 ‘비밀 상담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윤씨가 상담방에 모집한 이들은 신체검사 등급을 조작해 병역을 면제받으려는 의뢰자들. 신체검사 등급 조작에는 김모(26)씨의 진단서가 큰 역할을 했다.



발작 일어나면 응급실행

갑자기 심장 박동이 급격히 높아져 발작을 일으키는 발작성 신부전증이란 희소질환을 앓고 있는 김씨는 병역면제까지 받을 수 있는 자신의 병을 다른 이들에게 빌려 주는 방식으로 병역비리에 가담했다. 이른바 ‘환자 바꿔치기’ 수법을 이용한 것. 발작성 신부전증은 희소병인데다 언제 증상이 발생할지 모르는 병이기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들킬 위험성이 거의 없어 병역비리로 이용하기엔 제격이었다.

김씨는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면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신분 확인이 철저한 낮 시간은 되도록 피했고 밤늦은 시간에만 진단서를 끊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것으로 드러났다. 병원에 간 그는 자신의 건강보험카드가 아닌 다른 이의 건강보험카드를 내밀고 진단서를 끊었다. 병역 면제를 원하는 병역 기피자의 보험카드를 내민 것이다.

그리고 진단서를 윤씨에게 전달했고 윤씨는 이를 돈을 받고 의뢰인에게 전달했다. 의뢰인은 진단서를 들고 병무청을 찾았고 이를 본 병무청은 별다른 의심 없이 병역 면제 또는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내리거나 입영을 연기하기도 했다. 윤씨 일당은 이 같은 수법으로 2006년 1월부터 최근까지 32명의 의뢰인에게 돈을 받았다. 공익근무요원 판정이나 신체검사 연기 결정 등을 받게 해주는 대가로 윤씨가 받은 돈은 모두 3700여 만원.

윤씨는 병역을 면제받았을 경우 1억원, 공익근무 판정은 2000만원에서 3000만원의 커미션을 받는다고 정해 둔 것으로 전해졌다. 공범 김씨 역시 대학원생 김모씨 등 3명으로부터 3300여 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범행은 결국 죄책감을 느낀 김씨의 제보로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윤씨의 사무실과 서울 4곳의 대학병원을 압수수색해 컴퓨터 내부 자료와 병역 연기 신청 서류, 허위 진단서 등을 압수했다. 또 최근 3년간 윤씨의 통화내역을 조회해 1980~90년대 출생자 337명과 통화한 사실을 알아내고 이 가운데 32명이 윤씨 통장에 입금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중 명문 사립대 대학원생, 카레이서 2명 등 3명은 4급(공익근무) 판정을 받은 것이 확인됐고 나머지 29명은 병역 연기 판정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때 윤씨 일당에 의해 병역비리를 저지른 이들 가운데는 유명가수 K씨가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져 연예계에 또 한 번 병풍이 부는 것 아니냐는 파문이 일기도 했다. 해당 가수 측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등 파장이 커질 조짐마저 보였으나 이는 해프닝에 그쳤다. 광역수사대 이광수 팀장은 지난 17일 브리핑을 열고 “검거된 윤씨를 통해 연예인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 조사했는데 전혀 없다고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당국의 관련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병역비리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병역비리가 나타난 시기는 국가행정체제가 정비되지 않았던 1950년대. 행정체제가 부실한 만큼 이를 악용한 병역비리 역시 숱하게 일어났다. 당시 병역비리 수법은 주로 장기간 병역을 피한 후 고령사유로 면제되는 방식이었다. 만 30세를 넘기면 병역의무가 소멸되는 것을 악용해 병역을 피한 것.
 
또 몸이 안 좋아 병역이 면제된 자들을 매수해 대신 징병검사를 받는 환자 바꿔치기 수법도 이 시기 성행했다. 1970년대에는 질병을 이용한 병역비리가 많아졌다. 당시 주로 이용된 질병은 결핵, 간염 등이었다. 결핵의 경우 징병검사 전 쇳가루를 바르거나 잉크 또는 간장을 마셔 X선 촬영을 하는 원시적인 방법이 사용됐다. 징병검사장의 검사장비가 열악한 것을 이용한 병역비리다.

1980년대 역시 질병을 이용한 병역비리가 흔히 일어났다. 단 최신 검사장비로 결핵이나 간염 등의 질병으로 위장하기가 어려워 약시, 정신질환, 과체중 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에는 질병에 의한 병역면제가 축소되는 대신 국제화 바람을 타고 해외이민 및 영주권, 외국국적 취득을 통한 병역비리가 급증했다.
당시에는 해외로 이민이나 유학을 떠나 외국국적을 취득해 병역의무종료연령인 만 30세까지 버티다 국내에 영구 귀국하거나 영주권자의 경우 1년에 한두 번만 외국에 나가는 식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지능화된 신종 병역비리 수법이 사용되어 불법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이들이 속속 생겨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진화하는 병역비리

한편 이번에 벌어진 ‘환자 바꿔치기’ 병역비리로 병역을 회피한 당사자들은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복역할 전망이다. 이들은 재판결과에 따라 재검사를 받고 만 30세 미만인 자는 현역병 판정이 나올 경우 현역으로 복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