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정치 라이벌 ‘나 홀로 병원에’…다른 뜻 없나?

2009.08.18 10:18:33 호수 0호

병상의 DJ 찾아간 YS ‘화해 제스처’ 속내



YS 직접 DJ 병문안…오랜 앙금 씻고 화해의 뜻 전달
영·호남 거물들 화해로 동서화합론 구상 모락모락


한때 정치적 동지였으나 앙숙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극적으로 화해했다. YS가 병세가 위중한 DJ의 병실을 찾으면서 애증으로 점철됐던 세월을 화해로 감싸 안은 것. YS는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DJ를 대신해 부인인 이희호 여사를 찾아 쾌유를 빌었다. 이어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두 사람의 화해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DJ에게 YS가 일방적인 화해에 나선 것이라는 지적이 없지 않다. YS가 돌연 DJ와의 화해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0일 한 달 가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치료를 받고 있는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김 전 대통령과는 오랜 정치적 앙숙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DJ는 폐렴으로 입원한 후 병세가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갑작스레 위험스런 상황이 찾아오는 등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넘은 ‘옛 동지’
병상에 화해의 손짓


YS는 갑작스레 병실을 찾았다. DJ 측은 “단지 상도동 비서실에서 출발하면서 갑자기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할 정도로 뜻밖의 방문이었다.

오전 10시5분께 김기수 비서실장과 함께 병원에 도착한 YS는 영접 나온 박지원 의원과 이철 세브란스병원장을 만나 악수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로 올라갔다. 그의 방문에 놀란 취재진에게 “(DJ는) 나와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고 말했다.

YS가 DJ의 병실을 방문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YS의 말처럼 오랜 경쟁과 협력 속에 쌓인 앙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앙금이 쌓인 세월도 그들이 걸어온 정치적 생애만큼이나 길다.

YS와 DJ는 영남과 호남의 민주세력을 이끈 정치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관계가 틀어졌고 이후 22년간 끝없이 반목해왔다. 지난 1998년 DJ의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지만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이후 10여 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그동안 냉랭한 기운만이 흘렀다.

문민정부 시절 DJ가 YS를 가차없이 공격했던 것을 YS는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을 깎아내리면서까지 되갚았다. YS의 차남 현철씨의 사면 문제는 둘의 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1997년 YS는 DJ의 비자금 의혹에 대한 수사를 유보함으로써 대권을 향한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DJ는 2000년 8월에 가서야 현철씨를 사면했다.

YS는 이후 DJ를 ‘배신자’라고 칭하면서 DJ의 발언이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때마다 그를 비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 DJ가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부로 규정하자 YS는 “그 입을 닫아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입을 닫지 않으면 국민이 입을 닫게 만들 것”이라고까지 했다.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면서도 조우했던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두 전직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초청 행사와 노 전 대통령의 취임식 등에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2005년 11월 DJ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YS는 병문안 전화를 했고, 지난해 10월 YS의 부친인 김홍조옹이 별세했을 때 DJ가 전화를 걸어 애도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모습은 의례적인 것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 5월29일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YS는 DJ의 폐렴이 악화돼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던 지난달 17일 비서진을 보내 “조속히 건강을 되찾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한 게 전부였다.

의례적인 전화 안부 넘어
직접 방문 ‘화해의 꽃’ 선사


그러나 YS가 직접 병실을 방문하면서 길고 길었던 애증의 덫을 벗어나게 됐다는 평이다. YS는 병실에 15분간 머무르며 이희호 여사 등 가족에게 “모든 세상에 기적이라는 게 있으니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으라”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는 DJ에 대해 “나와 김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둘이 합쳐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는 아마 버마처럼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을 떠나면서도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면서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제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는 말로 화해를 공식화했다.

YS의 공언 이후 두 전 대통령의 화해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YS와 DJ의 개인적인 화해일 뿐 아니라 영·호남 거목의 화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영남과 호남의 민주세력을 각각 대표했던 두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목은 군부독재에 함께 투쟁했던 민주세력의 분열과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 인사들이 수년 전부터 두 전 대통령에게 화해를 권유했던 것도 그들의 화해가 동서화합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YS와 DJ의 화해 소식이 전해지자 지난 1984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인사들이 연합해 발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인사들도 DJ를 병문안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정신을 따랐다. 상도동계 인사이자 민추협 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은 “동서화합을 위해 그동안 그동안 YS와 DJ가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함께 참배하는 것을 추진해왔는데 실현시키지 못해 아쉽다”면서도 “YS의 이번 화합 메시지는 현대사적으로 의미가 크며, 이번을 계기로 민추협 차원에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후속조치들을 마련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YS가 전격적으로 화해의 손을 내민 이유는 무엇일까. YS의 DJ 병문안에는 주위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철씨 등이 “더 늦기 전에 화해하실 때가 됐다”며 꾸준히 설득했고 서청원 김덕룡 전 의원, 김무성 의원 등 상도동계 인사들도 화해를 적극 권유해왔다는 것. DJ의 건강이 안정될 때를 찾아 병문안하려 했으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급하게 병실을 찾았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YS측 김기수 비서실장은 “전적으로 각하(YS)의 판단이었다”고 일축했다. DJ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도 YS의 방문이 동교동계 인사들의 제안에서 이뤄졌다는 말에 대해 “그런 제안은 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 의원은 YS의 방문에 대해서도 “직접 오셔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아시다시피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2~13년간 한 번도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는 말로 두 전 대통령의 화해 여부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했다. DJ는 YS를 향해 칼날을 세운 바 없으니 화해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화를 이루신 큰 어르신들”이라며 “좋은 말씀들이 앞으로도 오고 갔으면 좋겠다”는 말로 답변을 마무리했다.

박 의원의 발언처럼 YS의 방문이나 화해는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병상에 누운 DJ가 의사전달이 힘든 상황에 찾아가 직접 대면도 하지 않고 ‘화해’를 언급했다는 점이 그렇다. “이제 그렇게(화해했다고) 봐도 좋다”고 했지만 DJ 측에 직접적으로 화해하자는 의사를 전하지도 않았다.

전격 화해 속뜻 두고
정치권 설왕설래 계속


엄밀히 살펴보면 ‘나홀로 화해’지만 YS가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이다. DJ의 병환이 깊은 상황에서 DJ의 병문안을 간 것만으로 별말 없이 화해로 이해받았다. 또한 화해를 통해 깊게 패인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넘어설 기반을 마련한 ‘어르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것.

정가 한 관계자는 “단 한 번의 발걸음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모습은 전성기 시절 정치적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면서 “DJ의 병환 이후 민주진영의 결집시킬 동력을 여야를 막론한 ‘문병정국’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동서화합론을 끌어내는 것으로 ‘큰 어르신’으로서 해야 할 정치적 역량은 다 발휘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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