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미디어법 발언으로 정치적 파워 재확인
발등에 불 떨어진 이재오 “한 집에 두 권력자”
정몽준, 당내 세 확장 한계점 돌파책 강구 중
여야를 정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미디어법 처리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파워가 다시 한 번 발휘됐다. 중요한 순간 ‘한마디’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 박 전 대표가 정치 현안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면서 한나라당 내 잠룡들도 움직이고 있다. 이재오 전 의원은 스스로 족쇄를 풀고 나왔으며 정몽준 최고위원도 세 확장을 위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 전 의원과 정 최고위원의 연대설이 박 전 대표에 대한 견제와 맞물려 거듭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전면전을 알리는 깃발을 치켜들었다. 특유의 정중동 행보를 벗어나 민감한 정치 현안인 미디어법 처리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
박 전 대표는 지난달 19일 미디어법 단독처리를 위해 본회의가 열릴 경우 “반대 표결을 할 것”이라면서 야당과의 합의를 당에 주문했다. 한나라당은 서둘러 ‘박근혜안’을 수용하는 방안으로 법안을 재정비했다. 박 전 대표가 지적한 신문과 대기업의 방송진출에 따른 사전 사후규제 장치와 여론독과점 해소책을 마련한 것.
전면으로 나선 박근혜
미디어법 처리 ‘훈수’
미디어법 최종안은 ‘박근혜법’이라고 불리게 되면서 통과됐다. 박 전 대표도 “이 정도면 국민들이 공감해주리라 생각한다”며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줬다. 김무성 의원 등 당 내 친박 의원 뿐 아니라 친박연대 의원들도 ‘찬성’에 표를 던졌다.
정치 현안에 대해 발언을 아껴온 박 전 대표가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정치권은 ‘박근혜 파워’를 다시 확인했다. 박 전 대표의 도움 없이는 법 하나도 제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게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드러났다는 것이다.
반면 잃은 것도 있다. 미디어법 처리와 관련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박근혜 파워’의 근원이었던 ‘원칙’이 큰 상처를 입었다. 박 전 대표가 “이 정도면 국민들이 공감해줄 것”이라고 말했던 미디어법은 지난 연말 입법전쟁 당시 그가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는” 법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또한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제안한 여론독과점 해소책은 “사실상 모든 신문사의 방송진출을 허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효성이 없는 ‘생색내기 제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여야간 극한 대립을 부른 ‘중점 사안’은 전혀 바뀌지 않았음에도 박 전 대표가 태도를 바꾼데 대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이 늘고 있다.
야권은 박 전 대표를 향해 “기회주의자”라고 강도높게 비난하고 나섰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원래 박근혜 의원은 기회주의적 처신에 능한 분인데 이번에도 말 바꾸기를 통한 현란한 기회주의 처신이 아주 돋보인다”면서 “직권상정을 하지 않으면 국회의 본회의장에 가서라도 반대표결을 하겠다고 했는데 직권상정을 했고 합의도 되지 않고 박 의원이 제시한 안이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국민이 공감을 하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인지 그렇게 말 바꾸기를 해서야 되겠느냐”고 비난했다.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 나서면서 박 전 대표는 득과 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권은 그가 정중동 행보를 깨고 태풍 속으로 뛰어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가 한 인사는 “친박계 사이에서도 박 전 대표가 움직여야 한다는 이들과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이번 행보는 이러한 논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권을 향한 본격적인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몸풀기”라며 “자신의 강점을 드러낼 수 있는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행동반경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꿈틀’하자
족쇄 푸는 이재오
또 다른 관계자는 “정중동 행보가 함축된 말이 박 전 대표의 ‘힘’이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한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냐”고 지적하면서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다음’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전 대표가 행동에 나섬에 따라 당내에서 이에 대한 견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계파차원의 반발이라기보다는 잠룡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가장 두드러지는 이는 원내에 있지 않기에 더 절박할 수밖에 없는 이재오 전 의원이다. 이 전 의원은 미국 유학과 100여 일의 ‘정치적 휴지기’를 보내면서 원외 정치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당내 그의 계파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이재오’ 본인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어서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이재오’ 대 ‘반이재오’로 펼쳐진 서울시당위원장 선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울시당대회에는 중립의 권영세 의원과 친이계 전여옥 의원이 도전장을 냈다. 서울시당위원장은 조기전당대회와 내년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선거의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친이계, 그중에서도 이재오계가 최대 주주로 있는 서울지역에서 권 의원이 전 의원을 큰 차로 따돌리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는 “이 전 의원의 영향력에 손색이 생기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원외 당협위원장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세를 구축했던 이 전 의원이지만 지금은 ‘안방’에서도 힘을 못 쓰는 종이호랑이가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의원은 “대선이 끝난 지 일 년 반, 총선이 끝난 지 이미 일 년이 지났으니, 한 정치인이 자중을 하거나 심사숙고를 해야 할 물리적 기간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며 정치 활동과 관련한 족쇄를 스스로 푸는 동시에 박 전 대표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지난달 21일에는 자신의 트위터에 ‘한 집안에 권력자가 두 사람 있으면 그 집은 무슨 일을 해도 성과가 없다’는 뜻을 지닌 한비자의 ‘일가이귀 사내무공(一家二貴 事乃無功)’이라는 글귀를 올렸다.
9월 조기전대에도 적극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개각을 언급하고 나서자 다시 한 번 ‘조기전대론’에 불을 붙여 이 대통령을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이재오계뿐 아니라 정두언 의원도 가세했다. 정 의원은 “대통령도 내각을 개편하겠다고 한 마당에 당도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며 “지금 이대로는 10월 재보선, 내년 지방선거가 어렵다. 더 이상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고 조기전대를 재촉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미디어법 통과 후폭풍에 대한 위기감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이 사퇴서를 제출하고 장외투쟁에 나서면서 필사의 각오로 덤비는데 미디어법뿐 아니라 정권까지 우려가 될 지경”이라며 “파장이 커지면 친이계를 중심으로 한 대응 움직임이 빨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 전 의원과 정몽준 최고위원의 연대설이 살을 붙여가고 있다. ‘현 정권의 승리 없이는 다음 대권도 없다’는 것 외에도 ‘박 전 대표를 견제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최고위원도 대권을 향한 위치 확보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2위를 차지, 당 최고위원직을 거머쥐기는 했지만 친이계와 친박계 사이에서 세를 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잡는 여권 잠룡
박근혜 견제 위해 ‘뭉쳐’
정 최고위원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울 강원 인천 경북 부산 울산 등 시도당별 국정보고대회, 종로 마포 의정부 하남 등 당원협의회 단위의 국정보고대회에도 참석하고 있다. 철저히 발품을 팔아 취약한 당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당내 주류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자신의 정책연구소 ‘해밀을 찾는 소망’을 통해서도 ‘사람’을 모으고 있다. 지난 17일 홈페이지를 오픈, 온·오프라인 회원들을 모집하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당권을 바라는 이 전 의원과 대권을 바라는 정 최고위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이 같은 ‘연대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최근 이 전 의원이나 정 최고위원 모두 현 정부에 힘을 실어주면서 ‘여당 내 야당’인 박 전 대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며 “이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면 ‘연대설’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자연스럽게 연대가 되는 모양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중 한 관계자는 “결국 현 정부와 일정부분 각을 세우고 있는 박 전 대표와 정권 성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들의 대립이 이뤄질 것”이라며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힘이 얼마만큼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드러난 만큼 친이계에서의 반작용도 크지 않겠냐”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