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지령700호를 발행하며

2009.06.09 09:27:49 호수 0호

진정한 1000원의 가치

앞면엔 퇴계 이황 선생의 초상이, 뒷면엔 명륜당과 ‘계상정거도’가 자리하고 있는 가로 13.6센티미터 세로 6.8센티미터의 종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1000원짜리 지폐의 모습이다.



현재 시중은행에서 발권하는 고액권 수표를 제외하면 한국은행 발권 전체 화폐 중 중고참급인 1000원이지만 별로 그렇게 쌈박하지 않고 뭔가 찜찜한 느낌의 지폐. 통용되는 지폐 중 가장 말단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받아도 달갑지 않고 줘도 손부끄러운 게 지금 1000원의 참담한 모습이다.

오죽하면 지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땀내 나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채로 동전들과 함께 나뒹구는 ‘천덕꾸러기’ 신세이겠는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더니 어느 여가수의 노래 제목처럼 ‘아 옛날이여’가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게 1000원짜리 지폐의 처지가 아닌가 싶다.

수표라는 게 없던 시절엔 일명 ‘배춧잎’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화폐의 지존으로 군림한 ‘세종대왕(1만원)’을 가까이 모시면서 거북선을 배후에 둔 ‘충무공 이순신 장군(구권 500원)’까지 휘하에 두고 지갑 속에서 귀하신 대접을 받았던 ‘퇴계 선생(1000원)’ 아니었던가.

물론 그때 역시 동급이면서도 앞에 5자가 붙은 ‘율곡 선생(5000원)’에게 다소 밀리긴 했지만 지금처럼 최말단은 아니었기에 다림질 세례까지 받을 정도로 행세 꽤나 했었다.


그때는 퇴계 선생 한 장이면 콩나물을 사고 무를 사고 두부 한 모를 사서 조촐하나마 서민들의 한 끼 밥상을 차릴 수 있었고, 솔담배 한 갑에 두꺼비소주 한 병까지 사서 착잡한 가슴을 달랠 수 있는 ‘거금’이었음은 물론이다. 

명절날 중·고등학생 조카들에게 세뱃돈으로 퇴계 선생을 내밀면 ‘멋진 삼촌’ ‘통큰 이모’로 인정받던 시절, 동네 구멍가게에 가면 얼음과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군것질거리 역시 100원짜리 동전 하나면 충분했었다.

1000원으론 겨우 시내버스와 지하철 한 구간밖에 못타는 요즘과 달리 택시를 타고 룰루랄라 기본거리를 갈 수 있었고, 휘발유 2리터에 경유는 무려 4리터를 넣을 수 있었기에 휘발유는커녕 경유 1리터도 채 못 넣는 요즘, 그 시절이 못내 그리운 퇴계 선생이다.

물론 요즘 들어 덥석 받아 챙기는 이도 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받을 손조차 없어 감히 엄두도 못냈던 커피 음료자판기는 요즘 겁도 없이 퇴계 선생을 받아 삼키곤 커피 한두어 잔을 선심 쓰듯 따라주고 달랑 100원 짜리 동전 몇 개를 짜증스럽게 뱉어낸다.

찬밥도 이만하면 완전히 쉬어빠진 찬밥이다.

그나마 지폐로서 유지하던 체모도 조만간 율곡 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5만원)’이 새 상전으로 등장하게 되면 동전으로 전락할 가능성까지 엿보여 이래저래 화폐계에서 퇴계 선생의 자리는 위태위태하다. 

하지만 잘 몰라서 그렇지, 아직도 우리에게 퇴계 선생은 매우 소중하고 귀하신 몸이다. 이 지구상에는 하루에 10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 무려 10억명이나 된다고 한다. 단돈 1000원이면 그 10억명에서 제외가 되는 셈이니 주머니 속 퇴계 선생을 하찮게 여겨서야 되겠는가.

북한에선 우리 돈 1000원으로 옥수수를 3킬로그램이나 살 수 있으며, 그 옥수수로 한 사람이 한 달은 너끈히 산다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디 그뿐인가. 누구나 로또복권을 사서 일주일간 부푼 꿈을 꿀 수 있고, 때론 뜻하지 않은 ‘대박의 꿈’을 이룰 수도 있는 소중한 종잣돈이기도 하다.

1000원이 가져다준 더 진한 감동도 있다. 모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전화 한 통화할 때마다 1000원씩 자동으로 기부되는 대국민 모금운동인데, 어느새 11년이 되었고, 그 사이 모아진 돈이 460억원, 여기에 개인과 단체의 후원금까지 합하면 610억원이 모금돼 지난 10년 동안 무려 4만5000여명에게 혜택이 돌아갔다고 한다.


퇴계 선생의 가치는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작금 지령 700호를 맞이한 <일요시사>와 접할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기 때문이다. 물가 급등과 화폐가치의 하락에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1000원짜리 한 장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타블로이드판 정통 시사종합주간신문 <일요시사>.

단돈 1000원으로 사람의 색깔과 소리를 느끼고, 잉크 냄새가 아닌 사람 향기를 맡을 수 있다니, 이런 소식을 접하면 아마 퇴계 선생께서도 흐뭇하게 미소짓지 않으실까?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아이들에게 1달러의 가치를 가르쳐 주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겐 1000원쯤 되는 돈이다.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밥을 챙겨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정도다. 1달러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부자가 될 수 없고, 설령 억만 달러가 손에 쥐어져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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