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획>충격의 토요일! 노무현 서거⑤ ‘바보 노무현’의 일대기

2009.05.26 12:00:56 호수 0호

삶도 승부사 죽음도 승부사 ‘자연으로 돌아가다’



‘7전 8기’ 정신으로 굴곡 많은 정치인생 버텨
민주화투쟁 앞장선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지난 23일 토요일 오전, 편안한 마음으로 휴일 아침을 보내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로서 영예를 누렸던 그가 이제 곧 한 줌의 재가 되어 세상을 떠난다. 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과 성장과정 등 그의 일대기를 짚어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의 빈농 집안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진영읍내에서 초·중학교를 나온 이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굴곡이 심하고 비탈진 인생길을 걸어왔다. 머리가 좋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자 명랑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네에선 ‘노천재’로도 통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고뭉치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어머니의 충고를 자주 들어야 했다.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하기도 했고 한때는 막노동판에서 날품을 팔아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상고 졸업 이후 어망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가난한 시절 독학으로
사시합격한 ‘악바리’
 
그러다 군복무와 결혼(73년) 후 9차례의 도전 끝에 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 만인 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처음엔 주로 ‘돈 되는’ 조세소송을 많이 맡았지만 81년 부산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구속된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재야 변호사로서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열렸다.

노 전 대통령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모두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동시에 있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에게 ‘부림사건’ 변론은 첫 번째 열망이 두 번째 꿈으로 옮겨진 전환점이 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87년 노동쟁의 조정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21일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암울했던 당시 시절을 감안할 때 그의 변호 활동은 노동자들에게 크나큰 힘이었다.

그러다 88년 13대 총선에서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공천을 받아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인 출발이 좋았다. 그는 당시 5공 실세였던 허삼수 후보를 꺾고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했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그해 말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그렇지만 이후 14년여의 정치인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92년 3당합당을 거부한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4대 총선을 비롯,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 2000년 총선 등 무려 네 번이나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 같은 정치적 수난은 돌이켜보면 오히려 노 전 대통령에게 ‘약’이 되었다. 원칙을 무기로 한 승부사적 기질이 그를 모험의 바다로 빠져들게 만들었고 결국 새끼사자로 거듭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크게 세 번의 모험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92년 3당합당 거부이고, 두 번째는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 북-강서을 출마를 결정한 2000년 4·13 총선이다. 그는 이때마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담보로 승부수를 띄웠지만 3당합당을 거부하거나 서울의 노른자위 지역구를 차버린 결과는 모두 그에게 좌절을 안겨줬다.

세 번째 승부수는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의 이른 바 ‘단일화 대첩’.

이번에도 역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자산인 국민경선 후보직을 내걸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당내 반 노무현 세력의 줄 탈당이 진행되던 중 노 전 대통령은 “국민경선으로 후보를 단일화하자”고 선수를 쳤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선수를 쳐서 주도권을 잡고 나간다는 점과 협상과정에서 자질구레한 것은 모두 양보한다”는 그의 정치스타일이 먹혀들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경선 후보직을 내건, 곡예와도 같은 대도박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그러나 문제는 패자인 정몽준 후보에게서 얼마만큼 협조를 얻어낼 수 있느냐였다.

처음부터 순탄하진 않았지만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단일화의 시너지 효과는 탁월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압도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막판 정 후보의 유세지원은 대세 굳히기로는 너무 큰 우군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선거일을 불과 두 시간 남짓 남겨 놓고 정 후보의 ‘지지 선언 철회’라는 철퇴를 맞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히 대권을 거머쥐었다. 단일화 합의를 불복한 정 후보의 지지 철회는 이미 노무현을 낙선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런 노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성취를 향한 도전, 기득권세력에 대한 항거라는 두 가지 기질을 엿보게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5시에 눈을 뜨곤 했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거실에서 요가를 한 후 가부좌로 숨을 고르며 물구나무도 섰다. 맨손체조와 스트레칭을 섞어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동작도 있었다고 한다. 고시공부 때부터 30년 이상 계속해온 ‘요가 30분’에 대해 그는 “머리가 맑아진다”고 말했다.

어려서 지게질도 하고 산도 잘 탔던 노 전 대통령은 타고난 강골 체질이었다. 국민경선을 치르며 3개월 넘게 강행군하다 대선 과정에서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잔병치레가 없는 편이었다.

아버지(77세)와 어머니(94세)가 천수를 누렸고, 집에 혈압, 당뇨, 암 같은 유전 병력도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식 스트레스 해소법은 잠이었다. 화가 나면 한잠 푹 자고 털어냈다고 한다.

폭탄주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단상은 “제발 안 마셨으면…”이었다. 술은 약하나 분위기는 잘 맞추는 쪽이었지만 폭탄주 한두 잔이 오가면 얼굴이 벌게지는 등 태생적으로 술에 강한 체질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신’과 ‘원칙’ 중시한
굴곡 투성이 정치인생

노 전 대통령의 18번은 운동권 가요 ‘타는 목마름으로’와 선거 유세 때 따라 부르다 익혔다는 대중가요 ‘작은 연인들’(권태수·김세화)이었다.

입맛 없을 때 찾는 음식은 삼계탕이었다. 서울 효자동에 있는 ‘토속촌’이 그가 잘 가던 삼계탕 집이다. 부인인 권 여사는 “과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잡곡밥에 된장, 미역, 북어, 사골곰국, 채소로 만든 담백한 나물류와 국물김치를 좋아한다”고 전한 바 있다. 정계 입문 후엔 아침에 꼭 밥을 챙겨먹고 보약도 먹었으며, 음료는 녹차를 자주 마셨다고 한다.

운동은 ‘즐기는’ 쪽이었다. 복싱(중학교), 요트(초기 변호사 시절), 볼링(정계 입문 후)은 아마추어 수준이었고 골프는 해양수산부 장관(52세) 때 배웠다. 골프에 대해선 “칠 때가 돼서 쳤고, ‘핸디 30’에 딱 한 번 80대에 들어가 봤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머리(필드 입문)’를 얹어준 친구 강태룡씨가 전한 노 전 대통령의 골프 폼은 ‘자치기’ 형이었다. “드라이브(180∼200야드)가 장타는 아니고, 공을 잘 맞추는 ‘또박또박’ 타법이었다. 실수가 적고 게임에 열중했다. 물(워터 해저드)을 넘기기 꺼림칙하면 무리하지 않고 돌아가는 스타일”이 강씨가 전한 노 전 대통령의 골프관이다.

노 전 대통령이 좋아하던 축구선수는 홍명보, 윤정환,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이다. ‘창조적’이란 이유에서다. 친구 유영씨는 “고등학교 때 방과 후 고무공 축구를 많이 했고, 노 전 대통령은 기술은 없어도 체력이 좋았다”고 기억한다. 노 전 대통령에게 포지션을 묻자 “동네축구에 무슨 포지션이냐”고 되묻곤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독학을 해 왔던 터라 문제가 생기면 책을 먼저 찾는 다독형이었다. 컴퓨터도, 요트도 책으로 시작해 독학했고 원리가 담긴 서적부터 시작해 응용서적까지 읽는 게 노 전 대통령의 독서 습관. 부인인 권 여사는 “갖고 있는 책이 2000권이 넘고 거실까지 서재로 쓰고 있으며 미래학, 사상서, 경제, 경영, 국가전략과 관련한 책이 많고 의외로 소설은 적다”고 말한 바 있다. 재미있게 읽은 책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독후감(<리콴유 자서전>, 지미카터의 <나이 드는 미덕> 등)을 써 추천하곤 했다.

젊은 시절 습작도 있다고 한다. 울산 막노동판에서 다쳐 입원중일 때 2편의 단편소설을 썼는데 주제는 ‘희망도 없이 돌아다니는 노가다들의 삶과 애환’ ‘간호원 연가’였고, 모두 자신을 주인공으로 쓴 글이란다.

노 전 대통령은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사귀면 깊게 사귀었다. 소위 ‘경상도 촌놈’ 스타일이다. 사람을 사귈 때는 상대방 됨됨이를 따지는 등 상당히 세심하게 가리는 편이었다. 정치인치고는 심하게 낯을 가린다는 평도 이 때문이었다.

경남 대창초등학교―진영중―부산상고 등 그가 거친 학교의 동창 가운데 절친한 친구는 10명 정도뿐이었다.

고교 동창인 원창희, 강태룡, 중학 동창인 노태구 경기대 교수, 초등학교 동창인 이승보, 조용상씨 등이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이 고향을 찾을 때 추어탕과 막걸리를 함께하며 추억을 더듬는 멤버들이었다. “무현이가 술 한잔 걸치면 곱사춤을 추고 구성진 노래 가락으로 분위기를 띄운다”고 이들은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친구라도 원칙에 어긋나는 부탁은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에게 사소한 부탁을 했다가 무안을 당한 친구들이 부지기수다. 반면 빚보증을 섰다가 떼이고도 ‘내 탓’이라며 친구를 감싼 예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인 가운데는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부산지역 재야 인사들이 상당수 있다. 이 지역 재야 세력의 대부인 송기인 신부와 82년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눈빛만 봐도 서로 속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노 전 대통령과 절친했다.

송 신부는 80년대 초 노 전 대통령이 부산 미 문화원 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알게 된 사이로 노 전 대통령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이놈’하고 꾸짖을 수 있던 어른이기도 하다. 송 신부는 지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해서도 노 전 대통령 행보를 두고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질책했다고 한다.

고민 생기면 독서하고,
대인관계는 깊이 있게

문 실장 역시 노 전 대통령이 술잔을 기울이며 심경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 문제로 고심할 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게 측근들 전언이다.

손숙(연극인), 명계남, 문성근(영화배우), 김하기(소설가), 임정남, 강은교(시인), 이창동(영화감독), 박계동(화백)씨 등 문화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빼놓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은 특히 손씨가 환경부 장관에서 물러날 당시 “지식인이 들끓는 여론 때문에 상처 받아서는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변호사 모임’(노변모)의 이돈명, 황산성, 노경래, 최병모, 이석태, 박연철 변호사 등도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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