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묘한 변화가 눈에 띈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행동이나 사회 현상을 평가할 때 너무나 당연하게 쓰이던 말, “이기주의냐, 이타주의냐”라는 기준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에서도, 기업 조직에서도, 시민사회의 담론에서도 이 단어는 더 이상 중심적인 개념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마치 오랜 세월 사회를 관통해 온 도덕적 나침반이 어느 순간 조용히 책장에서 치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도덕으로 타인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권리와 구조로 문제를 설명하는 사회’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희생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가정을 위해, 회사를 위해, 혹은 국가 경제를 위해 개인의 시간과 감정을 뒤로 미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 이타주의는 마치 가장 순수한 미덕처럼 포장됐고, 이기주의는 조직 공동체를 해치는 부정적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그러나 MZ세대가 사회의 중심축으로 올라오면서 “왜 내가 나를 지키는 선택이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러워졌다. 이 흐름 속에서 이기주의·이타주의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유효한 잣대가 아니게 됐다.
개인의 선택을 도덕으로 재단하는 프레임 자체가 폭넓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고, 사회는 그만큼 조금 더 솔직해졌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 미덕이 아닌 선택의 영역이 된 것이다.
정치의 언어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지역 이기주의, 계층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같은 표현이 사회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자주 활용됐다. 하지만 지금 정치권에서 반복되는 단어들을 보면 공정, 투명성, 책임성, 이해충돌, 개인정보, 데이터 권리, 지속 가능성 같은 구조적 개념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이기주의라는 단어는 어느새 너무 단순하고 감정적인 단어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삶을 움직이는 힘이 복잡해졌고, 정치 역시 더 구조적인 설명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예전이라면 이기적인 정치 싸움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이해집단 충돌, 권력구조 미세 조정, 정당 내부 파벌 등 역학 같은 더 세밀한 언어로 설명된다. 이기주의라는 단어가 설명력을 잃은 이유다.
기업 조직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난다. 과거 기업 문화에서는 회사에 헌신하는 직원이 이타적 인재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제 핵심 가치가 완전히 달라졌다. 자기 돌봄, 경계 설정, 일·삶 균형, 번아웃 방지, 심리적 안전 같은 개념이 등장하며 이타주의는 어느 순간 불합리한 희생을 강요하는 도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은 더 이상 “팀을 위해 희생하라”는 문장을 쉽게 못 쓴다. 대신 “시스템이 문제다” “제도가 공정해야 한다” “역할과 책임이 명확해야 한다”는 언어가 중심이 됐다.
이기주의·이타주의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은 결국 개인의 선택을 도덕으로 판단하던 시대에서, 제도와 구조를 중심으로 문제를 분석하는 시대로 넘어갔다는 신호다.
더 근본적인 변화도 있다. 바로 생존의 프레임이다. 한국 사회는 고물가·고금리·고위험 시대에 들어섰고, 자산 격차, 세대 갈등, 부동산 가격 같은 거대한 구조적 문제들이 일상의 중요한 의제가 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남을 돕는 것보다 먼저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절박하다. 이를 이기주의라고 부르던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그것을 권리라고 부른다. ‘내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라고 정의하는 흐름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이기주의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규정하기보다는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는 낡은 언어가 되어버렸다.
흥미로운 점은 이타주의라는 말도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기부, 봉사, 공동체 활동을 이타주의로 치켜세웠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새로운 언어로 설명된다. 사회적 가치, ESG, 착한 소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처럼 훨씬 복잡한 구조와 흐름 속에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가 포함돼버렸다.
예전의 이타주의가 감정의 언어였다면, 지금의 이타적 행동은 경제·정책·기업 전략 같은 구조적 맥락 속에서 이해된다. 이타주의라는 말마저 기능을 잃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이기주의·이타주의라는 이분법이 사라진 이유는 시대가 변했고, 언어가 변했고,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더 냉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을 잘라 이기적·이타적이라고 규정하는 대신, 그 선택이 어떤 제도적 조건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구조가 공정한지, 그 선택이 지속 가능한지 등을 먼저 물어야 한다. 이는 사회가 성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며칠 전 밤 12시가 넘은 시각, 20년 넘게 레스토랑을 운영해 온 Y 사장이 카톡으로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데, 인생의 막차를 타는 기분처럼 너무 힘들다”고 필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잠시 후에는 “내릴 곳을 지나쳐 내렸다”는 메시지도 이어졌다.
필자는 “택시를 타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택시를 타듯 우리 삶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면 됩니다”고 답했다. Y 사장의 피로는 단순한 과로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이타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20년을 버텨왔다. 손님이 곧 가족이고, 한 명 한 명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선한 서비스라고 믿어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그런 관계를 더 이상 미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손님은 비용을 지불하고 음식을 먹으러 오는 구조적 관계 속에 있으며, 제공해야 할 서비스 역시 그 구조 안에서 정의될 뿐이다.
Y 사장의 판단은 이타심의 결핍이 아니라, 이타주의라는 낡은 기준에 자신을 너무 오래 가둬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시대가 변했듯이 서비스 관계도 새롭게 이해될 때, Y 사장은 비로소 덜 지치고 덜 상처받는 방식으로 자기 삶의 다음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기주의·이타주의가 사라졌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 단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거대하며, 우리 일상 깊숙한 곳에서 이미 현실이 돼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