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12월이면 거리는 자연스럽게 캐럴로 채워졌다. 특별히 누가 틀자고 정한 것도 아니고, 국가의 지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가게의 문틈에서, 노점의 스피커에서, 시장 골목의 낡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던 캐럴은 연말이라는 시간 자체를 설명해주는 공기였다.
특히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캐럴은 물질이 아닌 분위기로 사람을 위로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연말을 버텨온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온기가 됐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거리에서 캐럴을 듣지 못한다. 많은 이들은 그 이유를 ‘저작권’이라고 말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다. 캐럴이 사라진 것은 단순한 음악의 소멸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캐럴이 만들던 연말의 풍경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12월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합창장이었다. 백화점 앞, 재래시장, 동네 가게, 심지어 버스 종점 근처에서도 캐럴은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음질은 거칠었고, 스피커는 낡았지만, 그 소리는 사람들에게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캐럴은 소비를 자극하는 음악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리듬이었다.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도 캐럴은 ‘함께 사는 시간’의 상징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설렘을, 어른들에게는 한 해를 버텨온 자신을 위로해주는 배경음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일수록 캐럴은 더 큰 위로가 됐다.
그래서 캐럴은 단순한 ‘크리스마스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리에서 공유되는 정서였고, 개인이 선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함께 듣게 되는 사회적 소리였다. 그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소리를 함께 듣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캐럴은 원래 ‘크리스마스 노래’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캐럴을 크리스마스 전용 음악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캐럴(carol)은 중세 프랑스어 ‘카롤(carole)’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는 둥글게 손을 잡고 추는 원무를 의미했다. 즉 캐럴의 본질은 ‘함께 부르고 함께 움직이는 노래’였다.
종교적으로도 캐럴은 성탄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활절, 고난 주간, 성령 강림절 등 교회력 전반에 걸쳐 불려왔고, 실제로 옥스포드대가 엮은 <The Oxford Book of Carols>에는 연중 모든 절기에 맞는 캐럴이 실려 있다. 캐럴은 특정 날짜의 음악이 아니라, 공동체가 시간을 함께 건너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캐럴은 점차 상업화되고, 크리스마스 이미지에 고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럴의 핵심은 여전히 ‘함께 듣고, 함께 부르는 소리’였다. 거리에서 캐럴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공동의 소리가 사회에서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구조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캐럴이 없어진 이유, 저작권 아냐
거리에서 캐럴이 사라진 이유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은 저작권 문제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설명에 불과하다. 실제로 저작권료 납부 의무는 카페, 대형마트 등 일부 업종에 한정되며, 대부분의 소규모 가게는 저작권 문제 없이 음악을 사용할 수 있다.
사실 그 원인은 소음 규제와 에너지 규제다. 현행 소음·진동관리법에 따르면 매장 외부 스피커로 음악을 틀 경우 주간 65dB, 야간 60dB를 넘으면 과태료 대상이 된다. 이는 일상 대화 수준보다 약간 높은 정도로, 행인이 자연스럽게 들을 만큼의 음악을 틀기조차 어렵다.
여기에 에너지 절약 규제까지 겹친다. 매장 안에서 음악을 틀고 문을 열어두는 방식은 난방 효율 저하를 이유로 단속 대상이 된다. 결국 법과 제도는 ‘거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상황’ 자체를 구조적으로 차단해버렸다. 캐럴은 불법이 된 것이 아니라, 허용 불가능한 소리가 된 것이다.
음악 소비 방식 변화와 거리 침묵
캐럴이 사라진 또 다른 이유는 음악 소비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거리의 스피커와 라디오, 음반 노점이 새로운 노래를 접하는 통로였고, 자연스럽게 들은 음악이 대중의 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음악은 개인이 선택해 듣는 대상이 되면서, 공공의 공간에서 함께 소비되는 문화는 사라졌다.
MP3와 스트리밍,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음악은 완전히 개인화됐다. 이제 음악은 거리나 공간을 채우는 소리가 아니라, 각자가 선택해 소비하는 대상이 됐다. 듣는 시간과 장소, 취향까지 철저히 개인의 몫이 되면서, 함께 듣는 경험은 줄어들었다.
이 변화는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거리의 소리를 앗아갔다. 캐럴은 집 안이나 이어폰 속에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공공의 공간에서는 울리지 않는다. 거리의 침묵은 기술 발전의 부산물이자, 사회 구조 변화의 결과다.
캐럴이 흐르던 거리, 대중사회의 감정
캐럴이 울려 퍼지던 시절의 사회는 ‘대중사회’였다. 대중사회란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표, 비슷한 정보, 비슷한 리듬 속에서 움직이는 사회를 말한다. 방송은 동시에 시청됐고, 음악은 동시에 들렸으며, 계절의 분위기도 공유됐다.
대중사회에서는 개인의 취향보다 공동체의 정서가 앞섰다. 거리의 캐럴은 누군가에게는 시끄러울 수 있었지만, 이를 함께 사는 사회가 치르는 자연스러운 비용으로 받아들였다. 그 안에는 공동체를 우선하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이 사회에서는 질서와 통제가 비교적 쉬웠고, 동시에 공동의 감정도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캐럴은 그런 대중사회의 감정을 묶어주는 장치였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는 소리였지만, 그 불가피함조차 공동체를 이루는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다중사회로의 전환과 개인의 우선성
오늘날 우리는 대중사회를 지나 ‘다중사회’에 살고 있다. 다중사회란 개인이 각자 다른 정보, 다른 취향,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는 사회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것을 보지 않고, 같은 소리를 듣지 않는다.
다중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공동체의 편의보다 앞선다. 소음은 더 이상 함께 감수하는 요소가 아니라, 즉각 제거해야 할 불편으로 인식된다. 그 결과 누군가에게 불편한 소리는 곧바로 규제의 대상이 되고, 캐럴 역시 공동체의 정서를 나누는 소리가 아닌 ‘원치 않는 소음’으로 분류된다.
이 변화는 음악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국가와 조직의 정보가 절대적이었지만, 이제는 개인정보 보호가 그만큼 중요해졌다. 이는 진보이지만, 동시에 공동의 경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콘서트는 허용된 대중성, 캐럴은 금지된 대중성
흥미로운 것은 대중사회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공간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수만명이 모이는 가수의 콘서트나 스포츠 경기장에서 동시에 노래하고 환호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대중사회의 모습이다. 대중사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공간’ 안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콘서트장의 소음은 문제 되지 않는다. 수만명의 함성도 사전에 통제되고, 한정된 공간에서 비용을 지불한 사람만 누리기에 허용된다. 오늘날 사회는 대중성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된 대중성’만 인정하며 누구나 듣게 되는 거리의 캐럴만 규제한다.
이 대비는 오늘날 사회가 불편해하는 것이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공동체적 경험임을 보여준다. 콘서트는 관리되기에 허용되지만, 거리의 캐럴은 통제의 주체가 분명하지 않기에 불편의 대상이 된다. 다중사회는 대중사회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대중성만 선택하고 있다.
다중사회의 장점과 분명한 한계
다중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거부가 존중되는 자유로운 사회다. 누구도 같은 것을 보거나 듣도록 강요받지 않으며, 각자의 취향과 속도가 우선된다. 그러나 그 자유의 이면에서,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공동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대중사회는 하나의 리듬 속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위기 앞에서도 빠르게 결집할 수 있었다. 같은 정보와 감정을 공유했기에 방향을 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면 다중사회는 각자의 판단이 존중되는 만큼, 모두가 옳아도 하나의 움직임으로 모이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
캐럴이 사라진 것은 단순한 음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함께 듣는 사회’가 아니라는 증거다. 다중사회는 효율적이지만, 따뜻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단점을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캐럴 되살려 대중사회의 온기를
그래서 필자는 제안한다. 정부가 12월20일부터 31일까지 약 12일 만이라도 캐럴에 한해 소음 규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하자. 이는 무분별한 허용이 아니라, 소리의 크기와 시간대를 정해 지나치지 않는 범위에서 인정하자는 제안이다. 연말이라는 특별한 시간만큼은 거리의 온기를 다시 허용하자는 뜻이다.
이는 연말에 국민에게 던지는 어떤 정치적 메시지보다 강력한 위로가 될 수 있다. 특히 60대 이상 세대에게 캐럴은 추억이며, 삶을 버텨온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지켜야 할 정서가 있다.
시대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좋은 것까지 없애는 것이 진보는 아니다. 이제는 다중사회의 자유 위에 대중사회의 따뜻함을 다시 얹을 때다. 거리의 캐럴은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법과 제도는 사람의 마음을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숨 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