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의 머니톡스> 2025년 계엄령과 아이히만

  • 조용래 작가
2025.04.17 00:00:01 호수 1527호

“나는 나의 소임에 따라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고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 홀로코스트 주역 아돌프 아이히만이 했던 말이다.



공무원의 의무에 충실했던 평범한 딸바보 아저씨가 대학살의 주도자였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임무만을 수행한 그는 자신을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구속 취소를 결정한 판사가 항변한다. “나는 책임과 권한에 따라 엄격하게 법을 해석하고 판결하며 판사의 소임에 성실히 임했다.”

날(day) 단위로 산정하는 구속기한은 법에 명시돼있다. 체포적부심은 계산에 넣지도 않으면서 초과된 9시간을 석방의 이유로 찾아낸 판사의 가상한 노력은 온전히 범죄다.

윤 전 대통령을 석방 지휘한 검찰 수장의 주장이다. “나는 법적 절차와 소신에 따른 결정을 내렸다.”

‘고위급 검사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니 그야말로 집단범죄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 일이므로 개인의 죄의식은 ‘우리’로 미분돼 0에 수렴된다. 양심에 상처 따윈 전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아이히만이다.


권한을 행사하는 이들 중에서 스스로 법을 어겼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본 기억이 없다.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법을 모르는 국민들의 불평쯤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을 믿는 국민도 별로 없는 게다. 법이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의 존재만을 변명하므로 국민은 법을 의심하고 불신한다.

국민이 “이 따위 법은 있어서 뭘 하겠냐?”고 한탄하는 이유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IMF 외환위기의 신호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형집행정지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2007년도 얘기다. 그가 수감 중 저지른 새로운 횡령 범죄가 드러나 3년의 실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병원서 2심을 준비하던 정태수에게 법원이 출국 허가를 내줬다.

애당초 해외 도피가 불법은 아니었는데, 95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는 죽음으로서 끝난 건지 죽어서도 끝나지 않은 건지 알 수도 없게 돼버렸다.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2017년 봄, 우리는 이미 한번의 탄핵을 겪었다. 8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대통령 파면을 선택했다. 충격적인 사건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면 경향성이 생기고 추세로 굳어지기도 한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민 스스로 파면하는 전통은 성립된 셈이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공복이 주권자의 뜻과 헌법을 거스르면 탄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헌법에 따라 공정한 심판 과정을 거친 파면이라면 한번이 아니라 열번이라도 마다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미덕이냐 고통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반복된다는 데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전통은 아름답지만 참으로 고되다.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비용은 두고두고 갚아야 할 국민의 빚이다.

잘못된 지도자나 그를 선택한 국민이나 책임을 피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국정 공백과 정치 불확실성은 주가, 환율, 금리, 물가, 성장률, 수출, 투자와 소비 등 국민 경제 전반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란 사건 관련 재판과 그에 따른 행정 비용, 계획에 없던 선거를 치르는 비용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치르는 시간과 돈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 엄청난 비용은 어느 정도는 예측, 계산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눈에 보이는 비용’이다. 정작 두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대통령의 파면을 요구하는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광장서 정면 충돌했다. 집안에서, 거리서 쪼개진 채로 반목하는 사람들의 정서적 갈등 비용은 계산은 고사하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국민 감정의 무한 소모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먹고 살기는 힘들어지는데 서로 격려하고 응원해야 할 우리가 분열하고 있다.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이 처벌받고 새로운 행정부가 구성된다고 해서 상처 입은 감정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조용래는?]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또 하나의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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