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장준하 유골이 외치는 ‘피맺힌 절규’

2012.09.10 09:48:29 호수 0호

37년 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다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민족 장준하 선생. 당신이 당신의 온몸을 바친 민족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죽음에 귀납되어 온 것입니다.’ 시인 고은은 장준하 선생을 이렇게 평했다. 대선을 100여 일 앞둔 지난 9월 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미스터리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다시 파헤쳤다. 그리고 37년 만에 세상에 나타난 그의 유골은 죽음의 날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냈다.



공원묘지에 묻힌 묘가 올여름 폭우로 훼손된 지난 8월 1일, 37년간의 침묵을 깨고 한 남자의 유골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고 장준하 선생이었다.

그는 지난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일생을 마쳤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등산 도중 실족, 추락사한 것으로 종결했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제기됐던 숱한 의혹들은 37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었다.

그날 산에서 무슨일이

유골이 관 밖으로 쏟아지기 전날 밤. 미망인 김희숙(88)씨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깨끗이 한복을 차려 입은 남편이 “잔칫집에 다녀왔다”고 말한 꿈이었다. 이장(移葬)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37년 만에 드러난 유골에는 뚜렷한 두 개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두개골 오른쪽에 자리 잡은 정원형의 함몰과 오른쪽 엉덩이뼈의 골절.


의아한 것은 이 두 곳을 빼고 다른 곳은 모두 온전한 상태라는 점이다. 우측 방향으로 추락해 두개골과 엉덩이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라면 왜 그보다 훨씬 약한 갈비뼈나 목뼈, 어깨뼈는 멀쩡한 것일까.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은 이번에 발견된 유골과 1975년 당시 사체 검안의의 소견서, 추락지점의 지형 등을 토대로 국내외 법의학자, 신경외과 전문의 등 총 25인의 자문을 바탕으로 사망경위에 대한 입체분석을 시도했다. 분석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해머 등 정원형의 둔기로 가격당한 후 추락사로 위장하기 위해 던져진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단 1회만 가격해 지금의 두개골 부위에 치명상을 입히긴 어렵다. 추락사에서도 장준하 선생의 것과 같은 원형의 골절이 나타날 수 있다. 추락했다면 머리를 보호하는 등 생존반응이 나타나야 하는데, 전혀 없다.”

이같은 전문가들의 분석들 가운데 제작진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새로운 의문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망경위를 둘러싼 의혹의 상당부분은 장준하 선생과 함께 등산을 했던 유일한 동행자이자 목격자인 김용환씨에게 집중된다.

당시 “절벽을 건너려고 소나무를 붙잡다가 떨어졌다”는 그의 진술을 토대로 추락사로 결론이 났지만 그 후 그의 진술이나 행적에 의심스러운 사실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먼저 사고 당시 약사봉은 군사규제지역에서 풀린 직후로 장준하 선생이 등반한 코스에는 등산로가 없었다. 전문 등산가들은 장준하 선생이 하산한 산길은 장비 없이는 절대 내려갈 수 없는 길로 결론을 냈다.

이 길을 김씨는 장준하 선생이 추락한 직후 “벼랑길을 10분 만에 뛰어 내려갔다”고 진술했다. 더욱이 그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또 김씨는 수사를 받으며 10여 차례 약사봉 현장에 갔으나 장준하 선생이 추락한 지점을 한 번도 찾지 못했다.

방송이 나간 후 타살의혹이 짙어지자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장준하 선생 유족은 청와대에 사건 재조사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국가권익위원회를 통해 행정안전부로 배당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둔기로 가격당한 후 추락사로 위장하기 위해 던져졌다?
사건 후폭풍 정치권으로…‘독재자의 딸’ 박근혜 발목 잡나

역사 속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장준하 선생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숙적’이었다. 그는 1960~1970년대에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당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독재에 맞섰다. 사람들은 유신체제에 가장 강렬히 저항한 장준하 선생을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렀다. 

그는 1974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1년간 옥고를 치른 이후 박정희 정권에 결정적 치명타를 가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의문사한 1975년 8월 17일은 선생이 1945년 광복군으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위해 여의도 공항에 도착한 지 만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권씨는 1985년 <신동아> 8월호에 실린 ‘아버님은 암살당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버지는 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다”며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정희)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아버지가 죽은 건 오후 1시 30분이고, 일행이 산을 내려와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린 것은 오후 3시 이후다. 하지만 이미 오후 1시 누군가 집으로 ‘아버지가 크게 다쳤다’고 전화를 해왔다”고 썼다.

장준하 선생이 장남에게만 말한 그 문제의 날은 8월 2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D데이를 사흘 앞두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생전에 장준하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박정희만은 안 된다”고 주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시절 박 전 대통령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충성한다는 혈서를 쓴 뒤 일본 황군에 복무하며 독립투사들을 직접 고문했다. 장준하 선생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게다가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만은 안 된다”던 대통령 자리에 이제 그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까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현실이다. 사건의 후폭풍이 정치권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게 그 이유다.

만약 그의 죽음이 당시 유족과 재야의 주장대로 ‘정권에 의한 타살’이 맞다면, 유력한 차기 대통령후보인 박 후보에게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게 틀림없다.

박정희와의 숙명적 관계

유골이 의문사의 새 증거로 떠오른 것에 대해 박 후보는 “지난 정권에서 조사가 끝난 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세균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최근 “친일파 박정희에 의해 장준하 선생이 타살됐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37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외치는 피맺힌 절규. 정치적 논란보다는 그 진실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이제야말로 국민이 눈과 귀를 기울일 때다.

그것만이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우리가 갖춰야 할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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