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세대 대부’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2.01.02 10:52:19 호수 0호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떠난 ‘김 고문’ “강철 같은 의지는 영원히~”

[일요시사=정혜경 기자] 지난해 12월30일 새벽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났다. 김 고문은 양지보다 음지에 머물며 투쟁하던 80년대 운동권 세대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대부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던 김 고문은 뇌정맥혈전증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젊은 시절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다 입은 상처가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간 것. 투병 중에도 물밑에서는 야권통합에 힘을 실으며 한편으론 오는 4월 총선에 출마해 마지막 정치적 꿈을 펼치려 했던 그였기에 주변의 안타까움이 더욱 컸다. 대한민국에 민주화의 주춧돌을 견고히 다진 그의 굴곡진 인생사를 돌아봤다.

민청련 결성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당해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 민주운동 훈장


지난해 12월8일 한반도재단이 짤막한 보도자료를 내놨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해 11월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지만 빠르게 회복 중이며 예후가 좋다는 것이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권고에 따라 면회와 취재를 사양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투병사실 비밀로 하다
딸 결혼식 때문에 공개

김 고문의 입원 소식에 정치권은 술렁였다. 모두가 애써 말하지 않을 뿐 대개가 알고 있었던 그의 파킨슨병 투병설이 기정사실화 된 것이었다. 파킨슨병은 뇌의 흑질에 분포하는 도파민의 신경세포가 점차 소실되어 발생한다. 경직, 느림, 자세 불안정, 손떨림 등이 전형적인 증상이다. 증상이 서서히 악화하는데 개선되지는 않는다. 발병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심한 외상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알려졌다.

애초 김 고문 측은 입원을 언론에 알릴 계획이 없었다. 정치인에게 건강 악화는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김 고문이 이 같은 사실을 알린 건 지난해 12월10일 그의 딸인 병민씨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어서였다. 아버지인 김 고문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온갖 억측과 구설이 난무할 게 분명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반도재단 측은 그의 입원을 어쩔 수 없이 언론에 알렸다.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그의 증상은 악화됐다. 11월25일 정밀진단 결과 뇌정맥에서 혈전이 발견됐다. 혈전이란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서 만들어진 덩어리다. 혈전용해제로 덩어리를 녹여 없애는 치료가 필요했다. 11월29일 입원해 치료를 받던 김 고문의 몸은 약물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2~3시간 동안 의식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최상명 한반도재단 사무총장은 김 고문이 차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최 사무총장은 “‘힘내라’는 말에는 ‘고맙다’는 말로 대답해주고, 웃어주는 등 짧지만 대화도 가능하고 인지도 한다. 현재 의료진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치료하는 동안 올 수 있는 폐렴 따위의 기관지·구강 감염이다.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경직된 근육을 키우기 위한 재활 치료도 병행해야 한다. 적어도 12월 한 달 동안은 집중 치료를 받고, 향후 6개월간도 약물 치료를 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29일 비보가 날아들었다. 김 고문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처음 전한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29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김근태 선배님이 위독하다 하십니다”라며 “오늘이 고비일 듯하답니다. 슬프네요. 여러분도 같이 기도해주세요”라고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접한 주변의 격려와 응원이 이어졌다. 그러나 김 고문은 치료 도중 장기활동이 둔해지고 폐렴까지 앓는 등 2차 합병증이 겹쳐 상태가 악화됐고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김 고문의 사망은 사실상 고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지난 1985년 구속됐다. 그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씨로부터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하루 5~6시간에 달하는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는 고문당하는 내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당시를 ‘짐승의 시간’으로 표현한다.



전기, 물고문 거치면서
온몸이 만신창이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거치는 동안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독재정권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부인 인재근씨가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독재정권의 악랄한 고문 사실을 녹음해 미국 언론에 전하자 이는 곧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했고,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의 ‘세계의 양심수’에도 선정됐다. 어눌한 말투, 떨리는 손, 목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해 고개를 몸과 함께 돌려야 하는 불편함 등 김 고문의 몸에 남은 고문 후유증을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운동의 ‘훈장’이라고 칭송했다.

김 고문은 80년대 이후 민청련과 전민련 등 재야 민주화단체를 이끌면서 중견 민주화운동가로 각광받았다. 현실정치 참여를 미루던 그는 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면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15대 총선부터 서울 도봉갑 지역구에서 내리 세 차례 당선됐고 지난 2000년 8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면서 당 지도부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김 고문은 지난 2002년 3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초반 최하위로 쳐지자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당내 재야그룹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훈장으로 통하던 고문후유증이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김 고문을 ‘저평가 우량주’ 정치인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세계의 양심수’ 선정
총선 출마 꿈 좌절됐지만 “이제 편히 쉬소서”


참여정부 출범 이후 그는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과 운명을 함께 했다. 열린당 초대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지냈다. 지난 2004년 7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이후 잇따른 재ㆍ보선 패배와 지난해 5ㆍ31지방선거 참패로 열린당 인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듬해 6월 당의장이 돼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지만 열린당은 분열로 치달았고, 그의 지지율 역시 1% 대에서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 고문은 최근까지 세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지난 2008년 총선 때 자신을 버리고 뉴라이트인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을 택한 서울 도봉갑 유권자의 민심을 돌리려 발로 뛰었다. 총선에 출마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김 고문은 올해 초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총선에 출마할 생각이다. 내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이루는 데 기여하고 싶고,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를 이뤄 복지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대중적 인기 못 얻어
민주화 훈장 걸림돌

그러나 그는 지난해 10월18일 게시한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등졌다.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김 고문의 꿈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젊은 시절 독재정권과 맞서며 입은 상처 때문이다. 그렇게 김 고문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민주화의 고매한 의지만큼은 우리 곁에 남았다. 민주화를 위해 달려온 수십년, 이제 그 큰 짐을 내려놓고 독재도 고문도 없는 세상에서 편안하게 영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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