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그룹 ‘친일 논란’ 재부상 왜?

2011.08.31 13:32:57 호수 0호

부끄러운 ‘일제 완장’ 떼고 싶지만…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삼양그룹이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창업주의 친일 논란이 재부상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최근 창업주의 땅을 친일재산으로 분류했다. 후손들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앞서 또 다른 소송에서도 법원은 창업주의 친일 행각을 확인한 바 있다.삼양그룹은 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봤다.

창업주 친일파 확인 이어 재산몰수 정당 판결
유족 잇달아 소송 패소…기업이미지 타격 우려

고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의 땅을 친일재산으로 분류한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제3부는 지난달 21일 김 창업주의 손자 김모씨가 “조부의 전북 고창리 일대 땅 1만여㎡(약 3030여평)를 몰수한 국가귀속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친일재산국가귀속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반민족위)는 2009년 6월 일제에 적극 동참했다는 이유로 김 창업주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결정했다. 이어 지난해 2월 “친일행위로 얻은 재산을 몰수 한다”며 김 창업주가 보유했던 전북 고창군 땅 1만여㎡를 국가에 귀속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

이에 김씨는 친일반민족위 처분에 불복,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김씨는 “김 창업주의 행위는 일제 말 총독부의 강요에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소극적·피동적으로 한 것”이라며 “오히려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만주에 농장을 개척해 유랑하는 농민들을 정착하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김 창업주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인정된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임명돼 실질적으로 활동한 것이 없다고 보기 힘들다”며 “기업가나 유력인사로서의 통상 범위를 넘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고도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 창업주의 일제시대 행적을 둘러싼 친일 관련 소송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친일반민족위가 김 창업주를 친일인사로 지정하자 그의 후손 30여명은 2009년 9월 이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김 창업주는 일제의 침략전쟁이나 황국신민화를 위해 나선 적이 없다”며 “김 창업주가 일제 총독부의 강요로 민족기업인 경성방직 이름으로 국방헌금을 낸 적이 있지만, 이는 일제의 강요해 의한 것으로 민족기업 존립과 종업원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반박했다.

친일반민족위가 국방헌금을 낸 행위를 법인이 아닌 김 창업주 개인의 행위로 일방적으로 단정하고 친일의 낙인을 찍었다는 것. 따라서 재량권을 일탈하고 남용한 친일반민족위의 처분이 취소돼야 한다는 게 유족들의 요구였다.

유족들은 오히려 김 창업주가 독립운동을 지원한 민족기업가인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김 창업주는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대는가 하면 독립운동가에게 자금과 도피처를 제공하고 징병을 피해 온 수많은 젊은이들도 공장에 숨겨줬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해 12월 “김 창업주의 친일행위가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기업인으로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위해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 등 일제하의 권력자의 위협이나 강압에 못 이겨 일제의 식민통치에 가담했다는 사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 창업주가 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고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의 동생으로 호남 대지주였던 김 창업주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국내 기업에 근대적 경영기법을 처음 도입했다. 1924년 삼양그룹을 설립한 이후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회장을 맡는 등 재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9년 세상을 뜬 김 창업주는 7남6녀를 뒀다. 삼양그룹은 3남 고 김상홍 명예회장과 5남 김상하 전 회장이 2000년대 초반까지 회사를 이끌다 김 명예회장의 장남 김윤 회장, 김 전 회장의 장남 김원 부회장 등 3세들이 경영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의 형제들과 사촌들도 그룹 계열사에 몸담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친일 족적’을 남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제시대 주요기구 관직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친일반민족위에 따르면 김 창업주는 1941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그는 중추원 회의에서 “일본정신의 체득, 황도정신의 삼투를 통해 정신적 방랑자인 반도 민중을 구제·재생시키자”는 취지의 참의답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또 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민총력연맹 후생부장,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등의 ‘일제직함’도 보유했었다. 게다가 1935년엔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까지 등재됐다.

총독부 관직 꿰차

친일반민족위는 “김 창업주는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하는가 하면 1944년 전쟁 지원을 위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며 “대학생들을 상대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창업주는 1948년 9월 시작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정상참작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친일반민족위는 김 창업주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했다.

삼양그룹 측은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다. 자칫 불똥이 튀어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친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그랬다. 삼양그룹은 ‘일본’얘기만 나오면 화들짝 놀란다. 삼일절·광복절 또는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쟁점으로 일본이 타깃이 되면 더욱 긴장한다.

회사 관계자는 “소송에 대해선 회사가 한 게 아니어서 할 말이 없지만 역사가 깊은 기업 치고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운 기업이 없다”며 “당시의 기업 활동이 현재 국가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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