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박정희 기념우표가 어때서!

2017.09.18 10:34:00 호수 1132호

지난 2007년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신사임당이 채택됐을 때 참으로 아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시·서·화에 능했음은 인정하지만 다른 이유, 우리 역사에서 현모양처의 대명사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그녀의 다른 아들은 제쳐두고 이율곡과 그녀의 남편만을 놓고 살펴보자.



신사임당은 율곡의 나이 15세인 1551년에 사망한다. 율곡은 시묘를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생활을 하다 1555년 하산해 유학에 몰두한다. 이어 1558년 봄 안동의 도산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 해 겨울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한다.

이러한 정황과 그녀의 현달하지 못한 다른 세 아들들을 살펴본다면 신사임당이 현모의 대명사였다는 말은 성립되기 곤란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양처였을까. 필자는 그녀가 양처가 아니라 그녀의 예술적 끼를 받아준 그녀의 남편 이원수가 오히려 양부(良夫)라 표현함이 옳다 생각한다.

그를 위해 신사임당이 생존했던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자. 예술적 재능으로 신사임당 못지않았던 허난설헌과 우리가 기꺼이 조선조 천재 여류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옥봉의 삶을 실례로 들어보겠다.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예술적 끼를 발산하던 허난설헌은 결혼 이후 심한 갈등에 부딪치게 된다. 물론 그녀가 지니고 있는 예술적 소질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시가의 박해 등으로 비참한 결혼생활을 하다 27세란 나이에 요절한다.

다음은 이옥봉의 경우다. 서녀 출신인 이옥봉이 젊은 선비인 조원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정실이 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의 첩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 두 사람 간에 합의 사항이 있었다. 


이옥봉이 향후 시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시를 향한 그녀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고 남편 몰래 시를 지었던 일이 발각돼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가혹하게 내쳐진다. 그 일을 계기로 ‘몽혼(夢魂)’이란 시가 탄생한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고 신사임당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동 시대에 여자가 글을, 더하여 예술적 끼를 발산한다함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물론 황진이나 매창 같은 기생들의 경우는 예외였다.

당시에 예술은 사대부의 여자들에게는 금기시됐고 오로지 기생들의 전유물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신사임당의 남편은 그를 용인해줬다. 이 대목서 주변사람들에게 이원수가 받았을 냉대를 생각해보자. 

그런 경우라면 사임당을 양처로 보기보다는 그 남편 이원수를 양부로 표현함이 더욱 적절하다는 말이다.

각설하고, 지난 7월 우정사업본부가 금년 9월에 예정된 ‘박정희 대통령 탄생100돌 기념우표’ 발행을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 여론을 이유로 취소했다. 이에 대해 최근 한국대학생포럼이 박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위한 후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의 변을 들어보자.

“미국에선 2011년 민주당 집권기 때 공화당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우표가, 공화당이 집권한 올해는 민주당 출신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우표가 나왔다. 정치적 판단으로 배척하지 말고 존중할 부분은 존중해줘야 한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우표 발행을 취소한 한심한 작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대학생들의 말마따나 정치적 판단은 배제하고 존중할 부분은 존중해주라고 말이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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