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들먹인’ 사기꾼의 전국구 사기행각

2017.07.10 11:02:55 호수 1122호

순진한 얼굴로 뒤통수 ‘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이 있다. 믿었던 누군가에게 속았을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에게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기 사건이 악질 범죄인 것은 재산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자신도 모르는 새 생기는 타인에 대한 불신은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로 남는다.
 



“저는 사기꾼이라고 하면 말 잘하고 옷 잘 입고 그런 사람들인 줄만 알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나오는 그런 이미지 말이에요.”

경기도 시화산업단지서 ‘빅도어’ 제작업체 K사를 운영 중인 박모 사장은 더 화를 낼 기운도 없어 보였다.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 7개월 동안 스트레스로 치아가 5개나 빠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박 사장은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큰 공사로 접근

K사에선 빅도어라는 제품을 만든다. 건설현장 등에서 사용되는 큰 출입문으로, 사람 힘이 아닌 전기로 열고 닫는다. 박 사장이 백모씨를 만난 것은 지난해 3월 경남 창원의 두산중공업 공장 내 빅도어 보수공사를 할 때였다. K사는 백씨가 현장소장으로 있던 D사로부터 재하청을 받아 일하던 중이었다. D사는 두산중공업의 협력업체다.

지난해 12월 D사를 퇴사한 백씨는 K사에 접근했다. 백씨는 두산중공업 공장 내 보수가 필요한 빅도어 물량이 많으니 자신을 영업이사로 채용해주면 다수의 공사를 따올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당시 박 사장도 두산중공업 공장 내 빅도어 상황을 봐온 터라 백씨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두산중공업 공장서 일하는 동안 수리할 빅도어가 100개 가까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100개면 엄청난 물량이거든요. 액수도 크고.”

백씨의 말을 믿은 박 사장은 그를 영업이사로 채용했다. K사의 영업이사가 된 백씨는 공사를 따기 위해서는 접대비를 포함, 업무추진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600만원에 가까운 월급은 별도였다. 박 사장은 백씨를 위해 회사 법인카드를 내줬다. 백씨는 법인카드를 가지고 영업을 핑계로 술집 등에서 흥청망청 돈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은 창원의 한 술집 주인에게 돈을 보내주라는 내용의 문자가 백씨로부터 온 적이 있습니다. 신용카드 한도가 다 되는 바람에 돈을 못 냈으니 계좌로 쏴주라는 말이었습니다.”

밝혀진 것만 4개 업체
1억원 넘는 돈 가로채

이런 식으로 박 사장이 계좌로 이체하거나 현금으로 내준 돈이 1500만원에 달하고, 신용카드 대금은 2800만원에 이른다. 월급을 포함, 백씨가 준 정보로 K사 직원들이 움직이면서 쓴 비용, 중간서 받지 못한 공사대금 등을 합치면 1억원에 가까운 돈이 박 사장의 주머니서 나갔다. 

박 사장은 두산중공업을 상대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법인이 필요하다는 백씨의 주장에 올해 1월 회사까지 설립했다. 그는 설립한 회사의 영업이사가 됐다.

돈이면 돈, 직책이면 직책, 박 사장은 백씨의 요구를 거의 빠짐없이 다 들어준 셈이다. 그런데도 백씨에게서는 어떤 결과물도 나오지 않았다. 박 사장을 포함, K사 직원과 주변 인물들이 의구심을 품자 백씨는 2월 ‘건설공사 표준하도급 계약서’를 성과물이라며 가지고 나타났다.

작성일자가 올해 2월28일자로 기재된 계약서에는 발주자가 두산중공업으로 돼있다. 61억6000만원짜리 빅도어 보수공사 계약이었다. 그 사이 백씨는 두산 로고가 박힌 ‘현장 EHS 작업지시서’ 파워포인트 자료, 4600만원짜리 해체공사 약정서 등을 박 사장에게 끊임없이 들이 밀었다. 

또 이 같은 자료를 두산중공업 김 과장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그에게 받은 이메일을 전달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계약서를 보기 전에도 종종 연락이 끊길 때가 있어 의심스럽긴 했어요. 그래도 ‘열심히 영업하느라 연락이 안 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4월에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두산중공업 쪽에 확인을 해봤는데 계약서가 가짜라는 겁니다.”


박 사장과 지인 등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해당 계약번호로 계약이 체결된 사실은 없었다. 두산중공업 측은 이메일서 “T사(박 사장이 새로 만든 법인)는 거래업체에 등록돼있지 않다. 우리에게 발주받기 위해서는 거래업체로 등록돼야 하는데 T사는 등록도 돼있지 않다”며 “첨부한 계약서의 계약번호로 발주된 사실이 없다”고 답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땐 진짜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니다. 백씨는 늘 제 앞에서 두산 김 과장이라는 사람하고 통화했어요. 가끔 전화해서 뭐하냐고 물으면 두산 관계자들하고 회의하느라 전화를 빨리 끊어야 한다고도 했고요.”

백씨는 김 과장뿐만 아니라 오 부장 등을 거론하며 두산중공업 관계자들과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실제 박 사장은 백씨가 알려준 김 과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김 과장이라는 사람이 “네, 두산중공업 김○○ 과장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박 사장으로서는 안 믿을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백씨가 김 과장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취재 과정서도 자신을 김 과장이라고 소개했다. “두산중공업 김○○ 과장이 맞느냐”고 묻자 그는 “맞다”고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두산중공업 측에 확인해본 결과 김○○ 과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제주도서 현장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직급도 과장이 아니라 대리였다. 그러면서 “백씨와는 그가 현장소장으로 일했을 때 얼굴을 익혔을 뿐이다. 왜 내 이름이 거론되는지 모르겠다”며 선을 그었다.

대기업 관계자 아는 척
이 핑계 저 핑계 돈뜯어

백씨는 박 사장이 계약서 등에 대해 추궁하자 두산중공업 오 부장이 시켜서 한 일이라며 발뺌했다.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아무 잘못이 없다는 투였다. 백씨는 오 부장이 비리 등의 혐의로 두산중공업 본사서 해고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산중공업 측은 한 마디로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일축했다. 김 과장은 물론 오 부장이라는 사람도 없고 백씨의 말대로 비리 등의 문제로 부장급 인사가 해고됐다면 홍보팀서 사정을 모를 리 없다는 입장이다.

백씨의 사기 행각과 박 사장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씨가 모습을 감춘 후 박 사장은 경남 진주서 폐기물 수집 및 처리업을 하고 있는 N사와 경남 창원서 특수화물을 다루고 있는 M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백씨는 두 업체로부터 각각 1200만원, 450만원을 취했다. 허위공사와 장비 사용 등을 이유로 백씨가 두 업체로부터 받은 돈이었다. 두 업체는 세금계산서에 나온 박 사장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돈을 달라고 수차례 요청했다. 

부산의 한 철강업체도 900만원 정도를 자재 사용비로 백씨에게 건네주고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사장은 자초지종을 알아보려 했지만 백씨는 지난 5월11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 이리저리 빚이 많아 그동안 사장님 돈으로 돌려막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제가 벌인 일이니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끝으로 전화도 정지시킨 채 잠적한 상황이다.

문자 남기고 잠적

박 사장을 포함 N사, D사 관계자 등은 “백씨는 순하게 생겼다. 목소리가 작고 말도 더듬었다”며 “소위 말하는 사기꾼처럼은 안 보였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두산중공업 협력업체에서 현장소장으로 일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 사장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두 달 넘게 일을 놨다. 정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경찰은 박 사장과 N사로부터 고소당한 백씨를 쫓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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