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도종환도 장관하는 나라

2017.06.26 11:12:18 호수 1120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서 한국당의 모 의원은 도 후보자가 ‘2004년 도 후보자의 평양 방문기’서 “‘서울이 유혹, 타락, 탐욕이 뒤섞인 빛이라면 평양은 담백한 자존심으로 서 있는 승복(僧服)의 빛’이라고 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도 후보자는 “(평양은) 전깃불이 안 들어와 죽음의 도시 같았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먼저 그의 ‘평양 방문기’서 평양을 언급한 부분을 세분해 살펴보자. 

‘담백한’은 ‘차분하고 평온하다’ 혹은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존심을 거론할 때 달라붙는 수식어는 ‘강하다’와 ‘약하다’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담백한 자존심이라니.

여하튼 이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고 다음 문구인 ‘서 있는 승복의 빛’으로 가보자. ‘서 있는 승복’도 그러하지만 ‘승복의 빛’ 역시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난감한 일은 그에 대한 변명이다. 되도 않는 말로 기껏 떠들어 놓고는 평양은 죽음의 도시 같았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당당하게 장관에 임명된 도종환의 사고를 두 가지 관점서 살펴보자. 


먼저 시인 출신인 도 장관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영역에 대해서다. 혹시라도 그는 그저 술독에 빠져 펜 가는 데로 휘갈겨 놓으면 그게 문학, 특히 시로 성립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와 관련 우리사회 일부에 만연하는 문학에 대한 오해에 대해 지적해야겠다. 문학과 글쓰기 기술, 즉 글 장난은 철저하게 차별화돼야 한다. 문학은 말 그대로 글자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으로서 그 이면에는 치열함이 존재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공부와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야 하는 분야다. 그런데 일부는 글장난의 극치서 드러나는 미사여구를 문학의 본질로 알고 있다.

그런 연유로 일반인이 한 눈에 보아도 속칭 ‘개판으로 세상 살았던 사람들’의 글 일부만을 보고 그를 매개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환장하고 설쳐대는 개인과 문학단체 심지어 지방자치단체들의 모습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다음은 문장에 사용하는 수사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서다. 도 장관은 평양 방문기에서는 은유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질타에 대해 직유로 대응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직유와 은유에 대해 살펴보자.

간략히 이야기해서 직유는 ‘A는 B와 같다’나 ‘B같은 A’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A를 다른 대상 B에 동등하게 비유하는 것이고 은유는 ‘A는 B이다’나 ‘B인 A’와 같이 A를 B로 대치해버리는 비유법이다.

즉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원관념과 비유되는 보조관념을 동일시해 다루는 기법으로 예를 들어 ‘생긴 모습은 야차 같지만, 마음은 부처님 같다’고 하면 직유이지만, ‘생긴 모습은 야차지만, 마음은 부처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은유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궤변을 분석하면 ‘서울은 유혹, 타락, 탐욕이 뒤섞인 도시고 평양은 담백한 자존심으로 서 있는 승복(僧服)의 빛을 지니고 있는 도시’로 규정할 수 있다. 

즉 서울과 평양에 대해 명확하게 대조를 이루며 서울을 폄하하고 평양을 칭송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런데 그 평양이 죽음의 도시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치는 서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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