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법시험의 추억

2017.06.26 10:52:38 호수 1120호

사라진 개천…돈이 용을 키운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인생 역전의 사다리’라 불렸던 사법시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지난 21∼24일 지난해 1차 시험 합격자 중 2차 시험에 불합격한 인원을 대상으로 2차 사법시험이 치러졌다. 사법시험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도입 이후 존폐 논란에 시달렸다. 사법시험 존치 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지만 통과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 1947년 조선변호사시험 시행 이후 사법시험 70년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김씨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평생 ‘판·검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매일 새벽 4시 밭일을 나서기 전 아들 박씨를 깨우면서 한 말도 “얼른 일어나서 공부해. 판·검사 돼야지”였다. 아들 박씨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사법시험을 준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가난한 시절
유일한 희망

김씨 할머니의 바람은 손자에게로 이어졌다. 손자가 태어나자 김씨 할머니는 계룡산 중턱에 있는 절의 스님에게서 ‘법중(法中)’이라는 아명을 받아왔다. 법의 한가운데라는 뜻으로, 손자가 판·검사가 되길 바라는 간절함을 담은 이름이었다.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두고 ‘개천서 용 났다’고들 했다. 다 같이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이른바 전국이 ‘개천’이었던 시절에는 사시 합격이 상류층으로 가는 초고속 열차나 다름없었다.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대부분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자녀를 뒷바라지하느라 허리가 휘어도 부모는 그저 합격만 하라며 일에 매달렸다.


자녀가 사법시험서 1차라도 합격하면 동네 어귀에는 플래카드가 붙었다. ‘OO의 아들, OO사법고시 1차 합격’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날에는 동네 회관에 잔치가 벌어졌다. ‘소를 잡는다, 돼지를 잡는다’ 난리가 난 상황서 동네 사람들은 ‘합격턱’을 내는 부모를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47년 조선변호사시험 후 70년 역사
보통 사람들의 출세 ‘희망 사다리’

사법시험은 아직까지도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가세가 심하게 기운 집을 일으키기 위해 주인공이 도전하는 시험은 대부분 사법시험이었다. 

올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더 킹>서도 주인공은 지긋지긋한 현실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사법시험을 선택한다. 사법시험은 합격에 이르기까지 힘들지만 일단 사다리에 올라타면 앞길이 탄탄대로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덕에 사법시험은 지금껏 우리나라 최고 시험으로 인정받아 왔다.
 

사법시험의 시초는 1947∼1949년 3년간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이다. 이후 1950년부터 1963년까지 고등고시 사법과가 시행되다가 ‘사법시험령’ 제정과 함께 현재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초기 사법시험은 합격자 모두 판·검사로 임용되는 사실상 임용시험이었다. 정원을 정해두지 않은 절대평가 방식으로, 평균 60점 이상이면 모두 합격하는 시스템이었다. 1967년에는 합격자가 5명에 불과했다.

선발 인원 늘어
2만 법조인 양성

그러다 1970년 합격 정원제가 도입된 후 합격자가 매년 60~80명으로 늘어났다. 1980년에는 합격자가 300명에 이를 정도로 문이 넓어졌다. 1995년 사법 개혁의 일환으로 선발 인원이 단계적으로 증원되면서 2000년대 초반 합격자 1000명 시대가 시작됐다. 1963년 이후 55년간 사법시험으로 배출된 법조인은 2만여명에 이른다.

사법시험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신림동 고시촌이다. 1980년대 초 신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고시촌’이라는 말은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공부방과 거주 용도로 사용하던 고시원이 밀집한 지역을 말한다.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관악산 기슭 여러 하숙집에 거주하다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말 그대로 전국 각지서 고시생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법시험 선발 인원이 증가하자 시험을 준비하는 지원자 역시 급증했다. 과거 선발 인원이 소수일 때 절에 들어가 머리를 싸매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풍토는 문호가 넓어지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학원서 나오는 족집게 요점정리 등 시험 정보가 고시생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고 시험 출제 경향에 대해 함께 스터디를 진행하는 일도 늘었다. 그 과정서 신림동 고시촌은 1990년대 고시생 숫자가 20만명에 이르는 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고시생이 모여들자 고시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 역시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했던 곳이 전 국무총리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과 가족이 운영했던 광장서적이다. 

광장서적은 1978년부터 2013년까지 35년간 신림동 고시촌의 상징이었다.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도 1988년부터 서울대생들의 세미나실 역할을 톡톡히 하며 명소로 자리 잡았다. 거대 상권이 형성된 신림동 고시촌에는 값싼 밥집과 술집이 들어섰고, 학원과 독서실 등이 얽혀 특유의 문화를 형성했다.
 

고시생들의 시간은 철저하게 사법시험 일정에 맞춰 돌아갔다. 신림동 고시촌의 시간 역시 고시생들의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 사법시험은 1차 시험에 합격하면 두 번의 2차 시험 기회가 주어진다. 1차 시험 합격 발표 후 바로 치러지는 2차 시험서 합격하긴 쉽지 않다. 보통 1년을 기다려 2차 시험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도 안 되는 합격률
대다수 고시낭인으로

두 번째 2차 시험서 떨어지면 다시 1차 시험에 도전해야 한다. 정신을 차려보면 4∼5년도 훌쩍 지나가 있다. 대입 시험처럼 재수, 삼수를 하다보면 10년도 금방이다. 그 사이 고시생들은 장수생이 돼있다. 고시촌 바깥에서 보기엔 ‘고시 낭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간이 흘러 있는 것이다. 일반인에겐 긴 시간이지만 고시생에게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흐른 세월이다.

100명 중 3명만
합격의 영광을


이렇게 해도 사법시험의 합격률은 3%가 안 된다. 100명이 도전해도 97명은 떨어지는 시험이라는 뜻이다. 절대적인 공부량이 많고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극소수 고시생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기약 없는 전쟁터에 내던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법시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서 가장 많이 내세우는 근거 중 하나다. 청춘을 다 바쳐 사법시험에 매달려도 결국 대다수는 ‘낭인’으로 남는다는 것.

노무현정부는 2007년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이른바 로스쿨법을 제정했고 2009년 전국 25개 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국회는 변호사시험법을 제정해 사법시험 선발 정원을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줄여 올해 전면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9월 사법시험 폐지를 예정한 변호사시험법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법시험의 폐지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 후보 시절부터 사법시험 존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낸 바 있어 큰 흐름을 뒤집기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30년간 고시생들과 울고 웃은 신림동 고시촌은 사법시험 존폐 논란이 불거진 시점부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그 바람이 조금 더 거세졌다. 서점, 독서실 등 신림동 고시촌의 명소들은 경영난을 이유로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광장서적은 부도가 난 뒤 ‘북션’으로 바뀌었고 18년간 자리를 지켰던 한국서점의 주인 아주머니는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로 변신했다.

고시 서적의 인쇄·복사를 담당했던 가게들 역시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한 집 걸러 하나씩 있던 독서실은 원룸으로 바뀌었다. 고시생이 빠져나간 자리엔 값싼 방을 찾는 직장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젊은 대학생을 위한 커피전문점과 주점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고시촌의 색채가 옅어지면서 새로운 성격의 건물도 생겼다.

일각에선 사법시험 폐지로 신림동 고시촌이 사라지기보다는 최근 늘고 있는 공시생이 고시생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실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들이 노량진에서 신림동으로 옮겨오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발 빠른 상인들은 법전 대신 공무원 수험서로 책장을 채웠고 사법시험을 대비하던 학원은 노무사나 법무사 등 다른 자격증 대비 광고로 전단을 바꿨다.

신림 고시촌
새바람 불어

변화의 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있는 고시촌을 보존하려는 시도도 있다. 김태수 대학동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은 “고시촌 풍경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고시촌 기념관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었다”며 “고시원을 개조해 30년의 고시촌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어 “지난번에는 뜻대로 안됐지만 올해 다시 한 번 도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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