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 박근혜 18년 정치사

2016.12.12 10:12:18 호수 1092호

최태민서 시작해 최순실로 끝나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국민은 탄핵을 원했다. 여론을 대변하는 대의기관인 국회의원들은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 처리했다. 이로써 18년간의 박근혜 대통령 정치 인생은 막을 내리게 됐다. 설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더라도 그의 정치는 이미 명분을 상실해 버렸다. ‘소신 정치인’에서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전락한 박 대통령의 정치사를 <일요시사>가 회고해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권에 처음 발을 들인 건 지난 1997년 12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총재를 지지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부터다. 이후 전략공천을 받은 박 대통령은 1998년 4월, 재보궐을 통해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와 관련해 정윤회씨 부친 정관모씨는 <채널A>와의 인터뷰서 “최순실의 어머니(임선이·최태민의 다섯 번째 부인)가 (박근혜 당시 후보) 운동원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등 박 대통령 정치입문 때 많은 힘을 썼다”고 주장했다.

실패한 대통령

국회의원이 된 박 대통령은 최태민의 사위이자 최순실의 남편인 정윤회를 보좌진으로 채용한다(정윤회와 최순실은 지난 1995년 결혼). 이때 문고리 권력 4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고 이춘상)도 정씨 추천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4인방 중 3명(이재만, 정호성, 안봉근)은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정씨뿐만 아니라 최씨와도 가까이 지낸 사실이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단숨에 현역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였다. 이렇듯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는 박 대통령을 정치 입문 2년 만에 한나라당 부총재로 만들었다.

이후 박 대통령은 대선 출마를 본격적으로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2년 자신을 전략공천하며 정계 입문에 도움을 준 이 총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야망을 드러냈다.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정당을 만든 것도 대권 도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군소 정당의 한계를 느낀 박 대통령은 결국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나라당은 창당 이래 최대 암흑기를 겪고 있었다. 일명 ‘차떼기 사건’으로 당시 당대표였던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헌재서 뒤집혀 역풍을 맞기도 했다.

한나라당으로 돌아온 박 대통령은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내 소수당으로 전락할 것이란 세간의 예상을 깨고 전체 299석 중 121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천막 당사’를 운영하며 구시대 정치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게 주효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기세를 탄 박 대통령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 평하며 보수 유권자들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또한 20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 도중 한 괴한으로부터 피습을 당했음에도 봉합 수술 직후 의식을 찾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은 박 대통령 곁을 지킨 사람이 최순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울질을 끝마친 박 대통령은 대권 도전을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2006년 6월 대표직서 물러난 그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와 격돌했다. 이때 후보 검증 과정서 최태민과 관련된 각종 의혹들이 지금처럼 쏟아졌지만, 이에 대해 박근혜 당시 후보는 철저히 부인했다. 결과적으로 박 후보는 이 후보에 밀려 대선 경선서 패배했다.

소신→무능→꼭두각시…추락의 끝은?
9부능선 넘은 탄핵 “헌재만 남았다”

박 후보가 대권을 잡는 데 실패하자 친이(친 이명박)계에 의한 ‘공천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반발한 친박계는 원외에서 ‘친박연대’를 조직, 1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들 12명 또한 과거 박 대통령이 돌아온 것처럼 친박연대를 해체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홍준표 당시 대표가 디도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다시 한번 당권을 잡게 된다. 이때 그는 당명 변경 등 당의 외형 변화를 이끈다. 새누리당은 이름을 바꾼 후 처음 치러진 총선서 152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또 다시 대권 도전을 선언한 박 후보는 절치부심한 모습이었다. 국민행복캠프를 차리고 좌장으로 김종인 의원을 영입했다. 김 의원을 통해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2012년 11월 국회의원 사직서도 냈다. 그해 대선에서 박 후보는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문재인 당시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은 처음부터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안대희·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잇따라 구설수에 올랐다. 장관 후보자들이 연이어 낙마하자 국정 공백이 발생했다. 또한 박 대통령은 청와대 주요 참모 및 부처 장관들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지 않아 불통 이미지도 공고해졌다.
 

그러던 중 <세계일보>가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을 담은 청와대 문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문건 내용이 아닌 유출 경위에 초점을 맞춰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검찰에 출석한 박관천 경정은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은 최순실이 1위, 정윤회가 2위, 박 대통령이 3위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대북 고삐를 당겼다. 대북 제재를 강화할 뜻을 밝히며 ‘통일대박론’을 발표했다. 헌재는 통합진보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갖고 내란을 논의했다고 규정, 정당해산을 결정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역사적 결정”이라고 헌재 결정을 평가했다. 이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백기를 들게 됐다. 최씨가 미르·K스포츠재단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의혹이 언론에 보도됐다. JTBC가 태블릿PC를 보도하자 국민들의 공분은 커졌다. 일반인인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 첨삭까지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후 최씨가 정부 사업과 인사에까지 손을 댔다는 점이 알려지자 분노는 촛불로 실체화됐다.

성난 민심에 박 대통령은 세 차례에 걸쳐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등 뒤늦은 수습에 나섰다. 특히 세 번째 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국회서 합의해 퇴진 일정을 정해 달라”며 국회로 공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매주 토요일마다 백만여명의 시민이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했다.

측근들 탓?

결국 박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이어 국민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온 두 번째 대통령이 될 공산이 크다. 탄핵은 이미 9부능선을 넘었다. 이제 헌재 결정만 남겨둔 상황이다. 만약 탄핵이 헌재서 기각되더라도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는 이미 상실한 상태다. 세월호 참사 때 열렬히 지지해준 보수층마저 이젠 등을 돌렸다.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소신 있는 정치인서 무능한 대통령으로, 최순실에 휘둘린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역사는 정치인 박근혜를 최태민의 망령에 휘둘린 실패자로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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