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때문에…” 대한민국 집단 우울증 진단

2016.11.21 11:38:43 호수 1089호

‘나는 뭐냐’ 상대적 허탈감에 멘붕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14년 4월16일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서 침몰했다. 172명 구조, 295명 사망, 9명 실종. 단원고 학생, 교사, 일반인, 선원 등 총 304명이 바다 속에 가라앉은 참사로 전 국민은 혼란에 빠졌다. 혼란은 분노로 바뀌었다가 이내 집단 무기력·우울증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세월호 트라우마’다. 그로부터 2년6개월 뒤, 국민들은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다.



“공부는 해서 뭐해요?”(고3 수험생) “코피 쏟으며 들어온 대학인데 누구는….”(대학생) “이력서 50장 썼는데 족족 떨어지고 있어요.”(취준생) “일주일에 네 번 야근, 월급은 100만원.”(중소기업 수습사원)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남는 게 없어요.”(족발집 주인) “기껏 뽑아놨더니 무당한테 나라를 맡겼다.”(70대 노인)

최씨 트라우마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나면서 전 국민은 연일 언론을 달구는 보도에 경악하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촛불을 든 국민들은 서울광장, 광화문 등에 모여 대통령 하야, 탄핵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달 29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진행한 1차 범국민 행동 집회에 2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인 것을 시작으로 지난 5일에는 20만명, 12일에는 100만명이 거리로 나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100만명이 모여도 소용없을 것.” “정치권은 물론이고 검찰, 언론 전부 한 패.” “집회에 나오긴 했지만 변화는 없을 것.” 등 비관론이 나왔다. 지난 2014년 4월 전 국민을 집단 패닉 상태로 몰고 갔던 세월호 참사 이후 또 다시 집단 무기력 현상이 국민들 사이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질병관리본부가 아주대에 의뢰해 수행한 ‘지역사회 건강조사 기반 사회심리 및 안전인식도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피해 지역인 경기도 안산은 불안, 스트레스, 자살 생각 등으로 고통 받는 주민의 비율이 타 지역에 비해 높았다.

안산 단원구(11.6%), 상록구(11.3%) 등 주민 10명 가운데 1명은 우울증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지역사회 건강조사’에서 안산 단원구 주민 4.3%, 상록구 주민 4.8%가 우울 증세를 보였던 것에 비해 5년 새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해결 불가능한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목격했을 때 집단 구성원이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국민이 투표로 빌려준 권력을 받은 대통령이 일반인과 그것을 나눠 가졌다는 점에서 경악할 만한 사건이다.

게다가 최씨가 문화, 국방, 외교 등 할 것 없이 전방위로 국가 정책에 손을 뻗쳤고, 그 딸인 정유라씨가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의 특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일상처럼 사용되는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등의 단어가 실제 눈앞에 현실화됐다는 점도 박탈감에 단단히 한몫을 거들었다.

지난 17일은 2016 대학수학능력 시험일이었다. 수시로 대학에 가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수능의 중요성이 비교적 낮아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10여년 간 수능을 위해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렇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학교생활의 기본인 출석일수조차 제대로 채우지 않은 정씨가 이화여대에 입학한 사실이 알고 분노했다. 또 그 과정에서 대학이 학칙을 바꾸고, 면접에서 상위권 학생들에게 낙제점을 주면서까지 정씨의 입학을 도운 사실이 밝혀져 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대입 취업 사업 이념…세대별 박탈감 심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집회 나와 한 목소리

학교는 정씨가 입학한 이후에도 여러 가지 특혜를 준 것으로 드러났다. 기본 형식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맞춤법도 허술한 리포트에 교수는 평균 이상의 점수를 줬다. 명문사학으로 불렸던 이대의 위상은 바닥까지 떨어졌지만 최경희 전 총장은 끝까지 정씨에 대한 특혜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평생교육 단과대학(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문제로 학교 측과 대립하던 이대생들은 정씨 특혜 의혹에 분노했고 농성과 시위 끝에 최 전 총장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정씨는 온라인으로 자퇴서 한 장을 낸 것으로 끝이었다.
 

또 정씨가 2014년 자신의 SNS에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글을 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들이 느낀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20∼30대 취준생 역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7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5월 경제활동 인구조사 : 청년층 및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준생 10명 중 4명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공시족이다. 일자리의 질이 낮아지면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추세가 심화됐다는 방증이다. 9급 공무원으로 3급에 오르려면 33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5급으로 시작해도 20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청와대 전 4급 행정관 이영선씨, 3급 행정관 윤전추씨, 2급 선임행정관 김한수씨 등은 최씨와의 인연으로 30대에 고위공무원 자리에 올랐다. 이씨는 TV조선이 지난달 25일 공개한 대통령 의상실 내부 영상에서 휴대전화를 닦아 최씨에게 두 손으로 건넨 인물이다.

헬스트레이너 출신 윤씨는 영상에서 서류를 보여주거나 옷을 직접 펼쳐 보이는 등 최씨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고위공무원이 최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이다.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씨 측근 연루 의혹이 불거진 포스코 계열 광고회사 포레카 강탈 시도도 있다. 차씨 측근들은 포레카를 인수한 중소기업 대표 A씨에게 지분을 넘기라고 요구하면서 거절할 경우 고강도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협박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송성각 전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이미 강요미수 혐의로 구속된 상태이며, 권오준 포스코 회장 역시 조사를 받고 있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로 공정성이 붕괴됐다는 지적이 나올 만한 대목이다. 고위직과의 인맥 하나로 돈, 권력 등을 부당하게 갈취한 자들의 모습은 점차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자영업자들을 좌절케 했다.

망가진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최근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는 1987년 전두환정부에 맞서 국민들이 거리로 나왔던 6·10민주항쟁을 떠올리게 했다. 6월 항쟁은 전국 20∼3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됐고 연인원 400∼500만 이상의 국민이 참여했다.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을 이끌어냈다.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세대는 현재 50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학생운동과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로, 최근 붕괴되는 민주주의를 보며 개탄하고 있다.

특히 50대는 18대 대선 당시 박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었다. 당시 50대의 82%가 투표했고, 그 가운데 62.5%가 박 대통령을 뽑았다. 하지만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의 11월 2주차(8∼10일)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를 보면 50대의 ‘긍정’ 응답 비율은 6%에 그쳤다.
 


‘콘크리트’라고 불리는 노년층이 느끼는 ‘배신감’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 수치를 통해 나타난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연령층의 긍정 응답 비율은 13%에 불과했다. 18대 대선 때 노년층의 80.9%가 투표했고, 그 가운데 72.3%가 박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줬다.

하지만 돌아온 건 예산 삭감, 복지 축소 등 ‘찬밥’ 대접이다. 더민주 오제세 의원은 지난 3일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내년도 예산안 심사 비경제부처 질의서 “최씨 관련 예산은 2714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46%가 급증했는데 저소득층 및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예산은 5772억원 삭감됐다”고 주장했다.

근본적 해결 시급

이 중 노인 분야는 경로당 냉난방비 및 양곡비 지원비가 전액 미편성 됐고, 노인요양시설 확충 관련 58억원 등 396억원이 삭감됐다. 이는 과거 집회나 시위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던 노년층이 광화문으로 나오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결 없이 사건이 흐지부지된다면 국민이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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