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김우일의 한국재계 30년 비사

2008.10.24 12:00:39 호수 0호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 함수관계 ⑭전두환 편
“6개월안에 먹어치워!”
‘장충체육관 황제’으름장에 회장단 ‘깨갱’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A 그룹은 대우그룹의 인수조건을 알아낸 후 이보다 더 약한 조건으로 인수하겠다는 복안이었고, 청와대를 비롯해 이미 여러 라인을 가동하고 있는 상태였다. 절대 비밀사항인 경남기업의 실사규모, 부실상태, 시드머니 규모, 기타인수조건을 알아내야 했다. 그러던 중 필자에게 고교동창 K씨가 갑자기 나타났다.

“총수들 입 막아라”언론에 먼저 발표

A그룹 비서실 과장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K씨는 총수의 지시라며 온갖 스카우트 조건을 제시했다. 인수조건의 자료를 건네주면 임원과 억대 이상의 연봉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특히 A그룹 총수의 경남기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창 잘 나가는 대우그룹과 경쟁사인 A그룹과의 빅딜은 애초 성사 될 수 없는 것이었다. A그룹 총수는 경남기업 인수 실패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대우그룹은 기존의 해외시장인 리비아를 독점한 상태에서 경남기업 텃밭인 중동아시아의 사우디아라비아를 흡수하는 효과를 거둔 반면 A그룹은 전혀 해외시장의 교두보를 갖지 못했으니 A그룹 총수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해외건설업계의 정리가 끝나고 또 광풍이 불어왔다. 해운업계가 세계경제 침체의 여파로 된서리를 맞게 됐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대처 방법이 달랐다. 해외건설업체의 경우 무관심 속에 회사는 이미 엉망진창이 돼버렸고, 부도난 회사를 통폐합시키자니 인수자에게 별도의 당근을 줘야만 했던 아픈 경험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재벌그룹으로부터 강요 아닌 강요로 기부금을 받아 왔던 대통령은 이 시드머니가 대가로 비쳐지는 것이 신경 쓰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그 존재가치를 잃었던 유신헌법의 잔재를 이용해 대통령이 된 그였다. 장충체육관에 모인 권력의 허수아비인 통일주체대의원들이 모인 대통령선거에서 1인 출마, 득표율 99%라는 모습으로 대통령의 자리를 따냈던 그였다. 그러니 대통령을 향한 반대세력이 없을 리 없었다.

정통성이 결여 된 대통령은 여론의 향방과 반대세력에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시드머니라는 당근을 줌으로써 대통령은 재벌그룹 특혜라는 따가운 비판의 소리도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거액의 시드머니를 한 기업에게 주기 위해 동일인에게 일정규모 이상의 대출을 금지하는 은행법상의 규제를 피해 나가야 했고, 법을 고치기보다는 특별조치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해운업계는 엉망진창 되기 전 사전에 손을 써 시드머니라는 해괴망측한 씨앗을 없애고 싶었다. 수급의 악화로 골병을 보이는 해운업계에서 약육강식, 즉 살아나갈 수 있는 강자가 살아나가기가 힘든 약자를 흡수 합병해 몇 개의 큰 기업으로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속셈이었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각 재벌그룹에 해운업의 통폐합을 지시하는 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해운업은 항공운송, 육로운송과 더불어 물류체계의 중심에 서는 중요한 산업기반이며 세계경제로 뻗어나가는 재벌그룹의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업종이다. 특히 자동차와 전자를 생산·수출하는 그룹에서는 수출물량의 운송력 확보차원에서 자동차운반선과 컨테이너선의 자체보유가 더욱 효율적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조선업을 영위하는 그룹은 수주물량 확보차원에서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전후방 산업연계에서 ‘제조업·운송업·조선업’의 3단계 시너지효과는 재벌그룹 총수에게 무시할 수 없는 산업영역인 셈이다. 참모들의 안에 따라 대통령은 각 총수의 희망과는 관계없이 중소 해운업체를 대규모 해운업체에 매각하고 흡수합병토록 하는 조치를 만들었다. 해외건설업체 정리에서 매각회사와 인수자를 미리 언론에 발표함으로서 총수들의 담합과 억지춘향의 행태를 보아왔던 대통령은 이번에도 총수들의 해운업계 고수방침이 알려지자 총수들끼리의 중상모략과 이전투구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특별조치를 단행해 버렸다.

구속력이 없는 언론에 미리 초안을 발표해 재벌그룹의 의향을 떠보는 것보다 아예 청와대의 안대로 해운업산업합리화 의결을 단행했다. 인수자와 매각자를 미리 합리화 의결문에 넣어버렸고, 국무회의를 거친 뒤 이 의결문을 각 재벌그룹 총수들에게 전달했다. 백가쟁명인 총수들의 입을 처음부터 봉해버렸던 것이다.

‘6개월 데드라인’인수작업 전광석화

통폐합기간은 6개월의 기간을 뒀다. 당사자들끼리 추진하도록 하는 법보다 무서운 법이었다. 기업 M&A 과정상 6개월이란 무지하게 짧은 기간이었다. 현대, 한진, 범양 등 대기업 중심으로 중소기업들이 흡수되는 내용이었다.

대우그룹의 경우 대양선박과 해우선박의 두 회사가 있었는데, 이 두 회사 모두 이익이 나고 그룹의 시너지효과를 일궈낼 비전 있는 회사였다. 김우중 회장은 이 두 회사에 대한 애착이 컸지만 법보다 무서운 합리화 의결을 해버리니 순응할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즉시 기획조정실을 주축으로 인수자인 범양상선과 공동으로 실사작업이 진행됐고, 실사결과를 놓고 인수가액의 협의가 진행됐다. 통상 인수가액의 협의만큼 어려운 게 없다. 실사평가의 기준을 매각자는 가능한 최대치에, 인수자는 가능한 최소치에 두는 법이기 때문에 항상 쌍방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기 마련이다. 같은 자산이라도 평가기준에 따라 매각자는 1백으로, 인수자는 10으로 매겨질 수 있다.

인수자와 피인수자간 만남은 사실상 양 총수끼리의 전략에 따른 전격합의가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매각대상 회사들의 종업원 처우 문제로 시간이 지연되기도 한다.

하지만 데드라인을 미리 정해 놓은 해운업 합리화조치 덕택에 인수매각 작업이 전광석화와 같이 성사됐다. 아무리 의견이 달라도 6개월 내 통폐합이 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예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서로 개성이 다르고, 그룹의 목표가 다르고, 업종이 다른 총수들끼리의 합의가 신기하게도 잡음 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막무가내식 합리화조치가 오히려 더 효율적이었을 수도 있었다. 만일 자유시장을 흉내 낸 어설픈 자유재량식의 합리화조치였다면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총수들간 합의를 도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폭풍과 같이 불어 닥쳤던 당시의 상황에 위급했던 해운업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 지 뻔한 이치였다.

역시 위급한 경제를 살리는 데는 대통령의 일사불란한 통치철학이 필요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사분란하고 강경한 통치철학은 한편으로 자유경제의 기반을 후퇴시키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급한 경제를 살리는 일급 소방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서서히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기 시작했다. ‘장충체육관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아 온 대통령은 애초부터 물러나 국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뽑힌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잠시나마 정통성이 결여된 대통령직에 앉았던 것에 대한 속죄인 것 같았다.

대통령은 야당의 후보와 비교해 봤다.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는 김영삼, 김대중씨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5·16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 데 일등공신이지만 대통령의 눈 밖에 나 외유를 했던 김종필씨 등이 할거하고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박정희시대 때부터 유신헌법과 군사독재에 목숨을 걸고 맞서온 민주투사로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화산의 분화구와 같이 용솟음쳤다.

반면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해야 대통령의 육사동기친구이며 12·12 사태의 동지이면서 내무부장관, 체육부장관을 지내고 민정당대표로 있던 노태우씨와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경호실장으로 대통령을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장세동씨, 순수한 행전관료출신인 N씨 등이 있었다.

3김 지지율 두 자리 전두환 측근들 ‘빌빌’

국민들에 대한 인기, 과거 민주투사 경력, 정당정치 경력 등 어느 모로 보나 게임이 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에서 실시해본 여론조사를 보고 낙담을 금할 수 없었다. 김영삼, 김대중씨가 막상막하로 30% 지지율, 그 뒤를 이어 김종필씨 20%, 그리고 노태우씨, 장세동씨는 한 자리에 불과한 지지율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한 자리가 두  자리로 올라갈 수 없었다. 30여년 역사를 육군대장으로 대통령을 맞았던 국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군인 아닌 전문정치인에 의한 대통령을 열렬히 갈망했던 것이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의 후임자에게 넘겨주기 위해 헌법인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선거를 치를 것이라는 소문이 횡행했다. 또 ‘장충체육관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정리=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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