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 큰 웃음(?) 선사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2010.12.14 10:40:15 호수 0호

‘보온병(兵)’ 출신에서 ‘동네북’으로…‘상수스럽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만신창이다. ‘보온병’ 발언과 관련, 모진 뭇매를 맞아서다. 국민과 언론, 정치권을 가리지 않고 매서운 주먹이 날아 왔다. 동네북이 따로 없다. 어찌나 두들겨 맞는지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안 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에 안 대표를 모를 이가 없을 정도다. 이에 따라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보낸 가난한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야간고등학교 설립과 직장생활 그리고 사법고시 합격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부친이 돌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부모가 운영하던 기와공장은 사기꾼들에게 넘어갔다. 그때부터 그의 모친은 막노동을 하며 2남3녀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5남매가 모두 장티푸스에 걸려 앓아눕는 일까지 벌어졌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데다, 치료약도 변변치 못해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친의 지극한 간호로 그의 남매들은 모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안 대표에게 지난날의 어려웠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았다. 안 대표가 ‘생활형편이 나아져도 늘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공부한 안 대표는 서울대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여느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술, 친구들과 함께 대학 1학년을 보냈다. 하지만 2학년이 되면서 정치현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안 대표는 후일 6·3학생운동으로 불리는 한·일 회담반대 단식농성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3학년 때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 주모자로 유기정학을 받았다. 또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6·8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했다 ‘집시법’위반으로 전과자가 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안 대표는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갔다. 야간 중학교를 세워 진학을 못한 청소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냉혹한 현실 앞에 무너져 내렸다. 자금난으로 1년도 안 돼 문을 닫은 것.

야간학교를 청산한 안 대표는 풍한방직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2년 만에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고시준비에 돌입했다. 그리고 몇년 후, 안 대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쾌거를 누리게 됐다.



서울법대 진학 후
학생운동 뛰어들어

안 대표는 전주 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첫 출발했고 1985년 3월부터는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87년 1월 운명적인 사건을 접하게 됐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바로 그것. 이는 23세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사건이다.

당시 정권의 안보와 관련된 시국사건은 외부 압력으로 소신껏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 대표는 ‘정의에 반하여 비굴하게 사느니 명예롭게 사직하겠다’는 배수진을 치고 박군 사건을 처리해 나갔다. 결국 그는 진실을 밝혀냈고 6월 민주항쟁과 6·29 항복선언을 받아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검사직에서 물러난 안 대표는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박군사건의 영향이 컸다. 다시는 그와 같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끝에 안 대표는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인권의 파수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94년 9월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1996년, 4·11총선에서 경기도 과천·의왕시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안 대표는 승리를 거머쥠으로써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 진출하게 됐다.
이후 검사출신 의원으로서 옷로비 의혹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등 국회 국정조사에 위원으로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특보와 당대변인, 최병렬 전 대표 특보단장,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7대 국회 시절 박근혜 당대표 체제 하에선 김문수 경기지사와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주도했던 국가발전연구회와 수도분할반대투쟁위에서 활동하는 등 비주류 반박 진영에서 박 전 대표와 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어 17대 대선 당시 당내 공작정치저지 범국민투쟁위원장, 중앙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이후 원내대표로서 18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정부조직 개편 협상을 진두지휘하면서 리더십을 인정받기도 했다.

안 대표는 18대 국회 출범 이후 국회의장 경선에서 5선의 김형오 의원에게 패배했지만, 2009년 5월 원내대표직에 재도전, 친이계의 지지로 두 번째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2009년 4·29 재보선 참패 이후 당내 무기력증을 극복하고 강한 여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안상수 원내대표 체제’를 재탄생시킨 것. 이를 반영하듯 그는 원내대표 취임 이후 ‘여권의 해결사’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민주당은 6월 국회 개회의 선결조건으로 대통령의 사과 등을 요구했으나 안 대표는 단독국회 소집으로 응수해 야당의 등원을 이끌어냈다. 또 야당의 ‘MB악법 저지’ 공세를 뚫고 미디어법, 4대강 사업 예산안 등 굵직한 현안을 처리하는 돌파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친이 강경파’라는 이미지를 남겼고, 원내대표 임기말 터진 불교계 외압설은 본인에게 악재가 됐다. 이 때문에 전대 과정에서 안 대표는 ‘강경 친이의 구체제로 회귀해선 안된다’는 경쟁후보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러나 안 대표는 탄탄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당의 변화와 개혁, 화합과 상생을 내걸고 당대표가 되는 데 성공했다.

박종철군 사건으로
전국에 이름 떨쳐

하지만 안 대표는 최근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모든 것은 한편의 영상물 때문이었다. 문제의 영상물에는 지난 11월30일 연평도 피격현장을 방문한 안 대표의 황당한 실수가 담겨 있다. 안 대표가 잔해 속에서 시커멓게 그을린 보온병을 집어 들고 “이게 포탄입니다”라고 말한 것.

이에 네티즌들은 “안상수 매뉴얼-전쟁이 나면 군에 입대해 보온병을 들고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 들어가서 적들로부터 밥을 훔쳐 행방불명된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고, 안상수 대표는 보온병 포탄을 제조해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안상수 함부로 까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웃음을 준 적이 있었느냐? (안도현의 시 <연탄재> 패러디)” 등의 패러디를 쏟아내며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다.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을 뜻하는 ‘상수스럽다’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와 함께 네티즌들은 지난 흠결까지 들춰내며 조소했다.
지난 달 29일 북한의 연평도 도발 사태와 관련해 열린 토론회에서 안 대표가 “지금이라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서라도 입대해서 같이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데 대해 “가야 할 때 가야지, 늙어서 군대를 왜 가냐”는 비판을 하고 있는 것.

보온병 들고 “이게 포탄입니다”…네티즌 패러디 봇물
해프닝으로 끝날 문제 확산된 건 병역 면제 받은 때문

이에 앞서 지난달 27일 해병대 연평부대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영결식장에 참석한 안 대표의 사진도 구설에 올랐다. 모든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거나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가운데 안 대표 홀로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된 것. 이에 네티즌들은 문제의 사진을 퍼 나르며 그를 비난하고 있다.

이어 야당 의원들까지 가세하며 사태가 확산됐다. 민주당 차영 대변인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분이니 착각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다 구긴 체면이라 한심스럽다”며 “더욱이 연평도에 가서 안보쇼를 벌이려다 생긴 해프닝이니 더욱 무안한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의 실수는 자유선진당 최고위원회의에서도 회자됐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이진삼 의원은 “탄두가 날아오지 어떻게 탄피가 날아오는가. 고무풍선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인가”라고 일침했다. 105mm 포병부대 출신인 변웅전 의원 역시 “포를 쏘면 탄피는 포의 뒤로 빠지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북에서 쏜 탄피가 연평도까지 날아올 수 있는가”라며 “보온병을 들고 이것이 포탄이라고 하면 보온밥통은 핵무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조롱했다.

심지어 보온병 포탄 발언은 현재 외신에까지 보도되며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독일의 시사평론지 <포커스(Focus)> 인터넷판은 지난 2일 “여당 대표가 카메라 앞에서 포탄과 보온병을 헷갈렸다”며 안 대표가 포탄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사진을 싣고 이번 해프닝을 자세히 다뤘다. 이 매체는 “한국 여당은 북한 미사일을 보온병과 헷갈리는 바람에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며 “네티즌들은 안 대표의 인터뷰를 보며 그의 미숙한 군사지식을 놀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던 문제였다. 하지만 사태가 종잡을 수 없게 확산된 데는 안 대표가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병무청 자료에 따르면 안 대표는 지난 1966~1967년 사이 징병검사를 기피한 뒤 1969년에는 질병으로 입영 시기를 연기했다. 또한 1970년에는 2급 입대판정을 받아 현역 복무 대상에 포함됐으나 입영을 기피했다. 그리고 다시 안 대표는 1973~1974년에도 입영기일을 연기했는데, 당시 사유가 눈에 띈다. ‘행방불명’된 때문인 것.

군 면제 사유가 통상 질병인 점을 감안하면 안 대표의 사유는 상당히 특이하다. 이후 안 대표는 1975년 질병으로 입영시기를 다시 연기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인 1977년 무관후보생으로 편입됐으나 신체검사 및 퇴교 조치자로 입영의무가 면제된 이후 1978년 끝내 ‘고령’으로 소집 대상에서 제외돼 최종 면제 판정을 받았다.

입영 기일 연기
사유=‘행방불명’

작은 실수에서 비롯된 후폭풍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뭇매에 안 대표는 만신창이가 됐다. 어찌 됐든 간에 이제 대한민국엔 그를 모를 이는 없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인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안 대표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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