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손자 자살로 본]비운의 삼성가 야인들

2010.08.24 10:45:49 호수 0호

‘황제’에 까인 ‘왕족’들이 사라졌다

삼성가 3세가 자살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쩐’으로 좁혀진다. 돈 많은 재벌 집안에서 뭐가 그리 어려워 극단적인 선택을 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삼성과 등진 채 살아온 탓일까. 아니면 외면당해서일까. 그의 쓸쓸한 최후를 통해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삼성가 사람들’을 재조명해봤다.

창업주 차남 아들 이재찬씨 아파트서 투신자살
‘돈 많은 집안에서…’극단적 선택 배경 미스터리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 이재찬씨가 자살했다. 재찬씨는 지난 18일 오전 7시께 자신이 살던 서울 용산구 이촌동 D아파트 현관 앞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한 경찰은 경비원, 가족, 지인 등의 진술로 미뤄 재찬씨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생활고 시달려
부인과는 별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서나 증언이 없어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을 두고선 여러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로선 재찬씨가 수년간 직업과 고정소득이 없었던 점과 부인과 별거 중이란 점에서 생활고 또는 신병 비관, 가정불화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추정된다.

올해 46세인 재찬씨는 이 창업주의 차남 고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차남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조카인 셈이다. 재찬씨는 1983년 경복고를 졸업한 뒤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1997년 부친이 이끌던 새한그룹의 계열사 새한미디어 사장과 생활서비스부문장 등을 지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날이 훤한 3세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경영난을 겪은 새한그룹이 2000년 워크아웃 되면서 암운이 드리웠다. 그는 당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특별한 직업 없이 투자활동을 해 왔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엔터테인먼트 등의 개인사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종사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재찬씨는 사고 직전까지 D아파트 5층에 거주했는데 한 달에 150만원 하는 월세였다. 이마저도 본가에서 도와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재찬씨가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며 “최근엔 그 정도가 심해 우울증 약까지 복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찬씨의 가정도 불안했다. 그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장녀 선희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5년 전부터 별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혼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이 있는데 현재 선희씨가 데리고 있다. 재찬씨는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혼자 아파트에서 거주해왔다.

비운의 길을 걸은 것은 재찬씨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새한의 몰락과 함께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재찬씨의 부친 이 전 회장은 범삼성계열에서 분리된 삼성, CJ, 신세계, 한솔, 새한 등 가운데 새한을 맡았다. 하지만 새한그룹은 삼성 ‘위성그룹’중 유일하게 무너졌다.

삼성그룹에서 상무, 이사 등을 역임한 이 전 회장은 삼성그룹의 유력한 후계자로 꼽혔지만, 1966년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수감되는 등 부친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1973년 동생 이건희 회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독립해 새한미디어를 세웠다. 재기의 칼날을 갈던 이 전 회장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91년 58세의 나이에 혈액암으로 미국에서 치료 도중 타계했다. 대신 부인 이영자 여사가 ‘지휘봉’을 잡았다. 이 전 회장과 이 여사는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만나 연애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이 창업주를 비롯해 삼성가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부친 사망, 그룹 붕괴, 장남 구속…’
‘쓸쓸한 몰락’ 새한일가 비극의 연속
10년째 범삼성가와 등 돌리고 지내


이 여사는 일본인이다. 마쓰이물산 중역 출신인 나카네 쇼지의 딸로, 결혼 후에도 일본이름 ‘나카네 히로미’로 지내다 1986년 지금의 한국이름으로 개명했다. 둘은 3남1녀(재관-재찬-재원-혜진)를 뒀다. 장남 재관씨는 김용대 동방그룹 회장의 딸 희정씨와, 3남 재원씨는 김일우 서영주정 회장의 딸 지연씨와, 막내딸 혜진씨는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의 아들 명희씨와 혼인했다.

이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그룹은 가족경영으로 전환됐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이 여사와 재관씨가 각각 그룹 회장과 부회장을, 재찬씨와 재원씨가 각각 새한미디어 사장과 이사를 맡아 공격적인 경영으로 몸집을 불려 한때 재계 서열 20위권에 들기도 했으나 무리한 투자로 불과 5년 만인 2000년 공중분해됐다.

2003년엔 재관씨가 워크아웃 직전 분식회계를 통해 대규모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실형을 선고받는 등 불운이 이어졌다. 이들 가족은 새한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후 범삼성가와 등을 돌리고 지내왔다. 지난 2월 호암 탄생 100주년 행사 등 집안 모임에도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 새한일가는 벌써 1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비운의 새한일가 외에도 삼성가엔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잊혀진 사람들이 꽤 있다. ‘삼성가 양녕대군’으로 불리는 이맹희씨가 대표적이다.
이 창업주는 고 박두을 여사와 사이에 3남5녀(맹희-창희-건희-인희-숙희-순희-덕희-명희)를 뒀다. 이중 인희씨(남편 조운해 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와 명희씨(남편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는 각각 한솔그룹과 신세계그룹을 갖고 분가했다. 두 그룹은 현재 3세들이 모두 실권을 쥐고 있다.

비운의 새한그룹 일가
뿔뿔이 흩어져 은둔

숙희, 순희, 덕희씨 등 나머지 딸들은 내로라하는 집안으로 시집갔다. 숙희씨는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순희씨는 서강대 영상대학원장을 지낸 김규 교수와, 덕희씨는 이종기 전 삼성화재 부회장과 결혼했다. 이들의 3세들도 각자 전문분야에서 아무런 탈 없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큰 아들이다. 이 창업주의 장남 맹희씨는 20년 넘게 칩거 중이다. 그는 잠정적인 삼성 후계자로 막강한 권력을 차지했었다. ‘한비사건’당시 이 창업주가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리에 앉았지만, 1976년 ‘경영능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에게 밀려났다.

삼성에서 퇴출당한 맹희씨의 야인생활이 시작된 게 이때부터다. 맹희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한국과 외국을 들락거리다 1993년 회고록을 발간한 후 종적을 감췄다. 중국, 몽골, 필리핀 등 동남아를 돌며 여생을 보낸다는 추정만 있다.

그의 자녀들인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 이재환 상무가 이끌고 있는 CJ그룹 측도 그의 거취를 모른다. CJ그룹 관계자는 “(이맹희씨는) CJ그룹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맹희씨가 삼성과 CJ로부터 두 번 버림받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이 창업주는 8명의 자녀뿐만 아니라 2명의 소생이 더 있다. 이 창업주가 일본을 드나들면서 만난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태휘씨와 6녀 혜자씨다. 당시 본처인 고 박두을 여사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배다른 남매는 박 여사의 자녀로 호적에 올라있다.

맹희, 덕희, 화영, 수영, 태휘, 혜자, 재관, 재원, 혜진…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이들 역시 한국을 떠나 지내고 있다. 물론 근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건희 회장보다 11살 적은 태휘씨는 일본 게이오대학 출신으로 이 창업주 시절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제일제당 상무를 지내기도 했다.

태휘씨보다 9살 적은 혜자씨에 대해선 아직까지 알려진 게 없다. 태휘씨와 혜자씨는 1987년 이 창업주 타계 전까지 국내에 거주하다 사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진다. 또 남매 모두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게 전부다. 삼성 측도 이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창업주와 유일한 형제인 고 이병각 전 삼각유지 사장도 숨겨놓은 자식들이 있다. 이 전 사장은 애첩인 김송자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아들 덕희씨와 딸 화영·수영씨다.

1960∼8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국내 3대 고급요정인 ‘청운각’기생이었던 김씨는 1996년 <나비야, 청산가자더니>란 제목의 자서전을 통해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이 전 사장과의 은밀한 관계를 폭로했다. 일반인들은 출입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청운각은 한국 막후정치와 밀실회담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이 자서전에 따르면 ‘재계 풍운아’로 유명했던 이 전 사장은 청운각의 문지방을 자주 넘으며 김씨를 품에 안았다. 이 전 사장은 1966년 공교롭게도 ‘한비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와중에 불국사 석가탑과 황룡사 초석, 통도사 부도 등을 파헤친 경주일대 도굴사건의 장물 최종 취득자로 구속돼 중과실 장물취득과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금고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결국 둘은 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김씨가 홀로 어렵게 키웠다. 김씨는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했던 지난날의 삶을 세상을 향해 고해하듯 털어 놓음으로써 절망에서 벗어나 마지막 희망을 찾으려 한다”며 책에 삼성가로부터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신과 자녀들의 아픔을 담았다.

‘정식 혼인은 물론 세 자녀를 낳고 살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버림을 받아 자녀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요정에서 기생으로 있던 중 19세의 나이로 38년이나 연상인 이씨와 만나 행복했습니다. 이도 잠시. 이씨의 돌연한 죽음 이후 문밖으로 내몰려 지하 월세방에서 누추한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거취·근황 미확인
직계 가족들 수두룩

이건희 회장과 이복사촌인 덕희·화영·수영씨가 지금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삼성가와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까지 가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