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펀드 안 내는’ 간큰 회장님 막전막후

2015.11.23 11:21:50 호수 0호

낼 돈 없다고?…대통령이 지켜본다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청년층의 경제적 자립 여부는 어느덧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야심차게 출발한 청년희망펀드의 취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단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만큼 순조롭게 모금이 이뤄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재벌의 참여를 강요한 까닭이다. 다만 몇몇 재벌 총수는 자발적 참여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인상이 짙다.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간이 큰 걸까.



재벌 총수들이 릴레이식 동참에 나선 청년희망펀드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지난 9월 조성된 펀드다. 청년층 취업 기회 확대를 도모한다는 취지에 맞게 펀드기금은 청년 일자리 창출에 쓰일 예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제안하고 직접 기부를 한 이후 민·관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기부를 받고 있다.

버티는 대기업
안한 곳 상당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가세한 후 재벌총수들의 참여가 가속화됐다. 출범 초기 삼성그룹이 이 회장 명의로 200억원,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사재를 털어 20억원을 내놓았고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150억원 기부 의사를 표명했다. 이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0억원, 구본무 LG그룹 회장 70억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70억원,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30억원을 각각 기부했다. 이후에도 재벌 총수 및 대기업의 기부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부금 액수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재계 서열 순이다. 그 사이 청년희망펀드 기부금 액수는 1000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좋든 싫든 간에 기부금을 낸 기업들은 청년희망펀드를 기업 이미지 쇄신용으로 적극 활용하는 양상이다. 특히 면세점 사업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던 롯데, SK, 신세계, 두산은 비슷한 시기에 모두 청년희망펀드에 기부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기부금을 낸 기업들은 앞다투어 기부금 액수와 자신들의 사회공헌사업을 연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기왕 내야 할 돈이라면 최대한 생색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기부금을 안낸 기업도 다수 눈에 띈다. 10대 기업 가운데 현대중공업(8위)이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고 50대기업까지 범위를 넓히면 약 2/3가 아직까지 요지부동이다. 자발적 참여라는 점에서 어물쩍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마당에 기금을 내지 않는다는 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꼴이다. 다만 그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VIP 기부 이어 재벌 총수들 릴레이식 동참
재계 서열 따라 금액 책정…할당제 논란도

청년희망펀드에 기부금을 내지 않은 회사 가운데 일부는 정황상 기부금 액수를 제대로 책정하지 못하거나 내기 애매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물론 이들 상당수가 조만간 기부 대열에 동참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KT(11위)는 조만간 청년희망펀드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재원 마련 방식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부액은 기업 규모에 걸맞게 책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지금껏 이어진 청년희망펀드 기부는 재벌 총수가 솔선수범해 사재를 내놓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KT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 KT는 한 해 20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대기업이지만 사주가 따로 없다. 황창규 회장은 자사주를 5000주밖에 보유하지 않은 전문 경영인이다. 올해 3분기까지 10억원이 넘는 급여를 받았지만 재벌 총수에 비하면 재산이 현저히 적다.

만약 황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처럼 혼자서 수십억원을 기부하려면 올해 연봉을 전부 내놔도 부족하다. 결국 KT가 회사 규모에 걸맞게 기부액을 책정한다면 임원들의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내놓을 액수
눈치전 팽팽

기부금은 둘째 문제고 재벌 총수를 둘러싼 각종 악재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정신없는 기업도 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회사 자금 횡령한 혐의 등으로 지난 5월 구속 기소된 상태다. 매주 금요일마다 검찰과 장 회장 측 변호인이 위법 여부를 놓고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것만 해도 바빴다.
 

물론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이재현 CJ그룹(14위)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24위) 회장은 이미 기부금을 내놨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과 임원진의 이름으로 청년희망펀드에 25억원을 책정했고 효성그룹은 조석래 회장 및 임원진의 이름으로 20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1600억원대 조세포탈·횡령·배임 혐의로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고 조석래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 등의 혐으로 검찰로부터 징역 10년에 벌금 3000억원을 구형받은 상태다. 다만 동국제강은 이들보다 회사 사정이 더 나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극도로 나빠진 회사 사정상 기부금을 선뜻 내기 힘든 총수와 기업들도 제법 보인다. 대우조선해양(16위)은 얼마전 산업은행의 추가 자금 지원이 결정되고 나서야 겨우 기사회생했고 대우그룹 공중분해 이후 수차례 매물로 나온 대우건설(25위)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금호아시아나그룹(17위)은 박삼구 회장이 이제야 회사를 수습하고 나선 상황이고 동부그룹(20위)은 최근 5년간 10개 기업을 인수합병 했지만 이 중 8곳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는 등 한창 그룹 재편에 바쁜데다 김준기 회장은 자금 한 푼이 아쉬운 처지다.

경영진이 외국 인사거나 혹은 외국계인 기업들도 청년희망펀드에 무반응이다. 국내 기업문화가 제대로 반영되기 힘들다는 핑계가 그나마 먹힐만하다. S-OIL(26위), 한국GM(36위) 등 외국계 회사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기부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얼마전 사모펀드에 인수된 홈플러스(37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총수와 기업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일반적인 국내 재벌기업 형태와 조금 차이가 있다.

대림산업(18위), 부영그룹(19위)은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그간 활동이 일종의 가림막이다. 대림산업의 경우 이준용 명예회장이 얼마 전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에 전 재산 20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사회공헌사업에 힘쓰고 있다. 이 명예회장은 지난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사고 때도 피해 복구와 유가족 성금으로 당시 재계에서 가장 많은 20억원을 기탁 한 바 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역시 연세대학교 기숙사 기증을 비롯해 지난 8월 건국대에 80억원 기부 등 사회공헌사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청년희망펀드에 아직 기금을 내놓지 않고도 나름의 이유로 이리저리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해놓은 기업과 총수들이 상당수다. 별다른 이유 없이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기업도 여럿 된다.

자발적 아닌
사실상 반강제

흥미로운 점은 범현대가에 뿌리를 둔 기업들의 참여가 유독 저조하다는 사실이다. 펀드 설립 초기에 기부금을 내놓은 현대자동차그룹과 30억원을 기부하기로 한 현대백화점그룹을 제외한 현대중공업그룹(8위), 현대그룹(21위), KCC그룹(28위), 한라그룹(33위), 현대산업개발(41위) 등 50위권에 포함된 범현대가 기업 상다수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나마 현대중공업은 대주주인 정몽준 이사장이 경영에서 손을 뗐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다른 곳들은 총수가 직간접적으로 회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외에도 OCI(23위)를 비롯해 30위 내 몇몇 기업들도 청년희망펀드 기부에 동참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술 더 떠 50위까지 규모를 넓히면 참여한 기업의 비율은 더욱 줄어든다. 어쩌면 자신들 앞선에서 기부금을 내지 않은 곳 많은 만큼 일종의 면죄부가 쥐어졌다고 볼 수 도 있다. 물론 자발적인 참여인 만큼 표면상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건 겉보기에 국한될 뿐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청년희망펀드가 재벌기업 사이에 할당제쯤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얼마?’아직 고민 중인 회장
‘강제로 못내’무시한 회장도


펀드 출범 초기엔 사회 지도층, 공직자, 일반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기금을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지난 9월 황교안 국무총리는 “삼성에 2000억원을 내라고 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에 돈을 내라고 하면 1조원을 모을 수 있겠지만 기업이 스스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노력에 제한이 된다”며 기업 기부는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지금은 준강제적인 모금으로 변질된 모습마저 보여준다. 좋은 취지와 별개로 청년희망펀드는 기업의 입장에서 얼핏 ‘울며 겨자 먹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최근에는 정부가 청년희망펀드 기부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에 기부액 규모와 참여 시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거졌다.
 

청년희망펀드는 이런 배경 탓에 진정성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그룹 총수의 기부행렬이 청년들의 실업의 아픔을 헤아린 기부가 아닌 마지못해 하는 기부 아니냐는 것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돈을 내고도 찜찜한 상황이 됐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2000만원과 매달 월급의 20%씩 기부하는 청년희망펀드의 ‘1호 가입자’이지만 이달 중순까지 재벌총수의 참여가 있기 전까지 기부액은 60억원에 그쳤다.

이렇게 되자 청년층을 위한 기부가 아닌 정부의 눈치보기에 불과하다는 비아냥마저 나온다. 대통령이 앞장선 상황에서 눈치껏 기부금을 내는 게 차라리 속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 아무리 재벌 총수라도 약자에 속한다. 일부 기업들은 정부 인허가 사업이 걸려 있거나 총수와 기업 핵심 인사들이 수사 명단에 포함된 상황이다.

“낼까? 말까?
내는 게 속편해”

결국 알면서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있는 재벌기업 총수들이 시기를 봐서 기부 행렬에 동참할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치 없는 총수 혹은 기업으로 비춰지는 것보다 차라리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는 게 속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껏 자발적으로 사회공헌사업에 충실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추가로 좋은 일에 동참한다고 봐야지 별수 있겠나”며 “청년희망펀드가 어떤 식으로 쓰일지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냥 있기도 애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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