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포스트 조석래’ 시나리오

2010.07.13 09:06:03 호수 0호

답답한 ‘재계 청와대’… 갑갑한 ‘재벌 대통령’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호가 표류하고 있다. 선장이 갑자기 하선한 여파다. 그야말로 짙은 안개가 깔려있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모양새.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아 방향감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형국이다. 전경련은 뾰족한 해법이 없다. 물망에 오른 선장 후보들은 하나같이 손사래를 치고 있다. 수뇌부가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당장 순항은 어려워 보인다.


조석래 회장 임기 중 건강상 이유로 돌연 사의
후보군 모두 손사래…‘인물난’ 장기화 우려


조석래 전경련 회장이 지난 7일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2007년 3월 제 31대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조 회장은 2년 임기의 회장직을 연임 중이다. 내년 2월까지 잔여임기를 남겨두고 있다. 전경련은 “조 회장이 건강 정기검진에서 담낭에 종양이 발견돼 종양 제거수술을 하면서 회복을 시도했으나 회장직을 수행하기에 무리가 있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조 회장은 회원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그동안 재계를 대표하는 중책을 맡아 최선을 다하고자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주어진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게 되어 송구스럽다”며 “전경련이 한국경제 도약의 구심체 역할을 지속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건강이 회복되면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올해 75세인 조 회장은 지난 5월 정기 건강검진 결과 담낭에서 종양이 발견돼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서울시내의 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암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일각에선 조 회장의 사퇴가 자녀들의 해외부동산 구입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와 연관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조 회장의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과 3남 조현상 효성 전무는 해외 부동산 불법 취득 의혹을 받고 있다. 이들의 불법 거래 혐의를 수사해온 검찰은 현재 기소 여부를 검토 중이다.

이에 대해 효성그룹 측은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회사 관계자는 “조 회장의 사임과 검찰 수사는 전혀 관계가 없다”며 “수술 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무리하지 말고 쉬시는 게 좋겠다는 의사진 의견에 따라 전경련 회장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말했다.

‘빅4’ 하나같이 고사
“가능성 전혀 없다”

전경련은 다음달 초 임시총회를 열어 회원사 및 재계 원로들의 의견을 수렴해 새 회장을 추대할 계획이다. 전경련 회장 선임 절차는 ‘회원사 추천→ 명예회장단 및 고문단 의견 수렴→ 회장단 후보 추대→ 총회’순으로 이뤄진다. 전경련 회장은 그동안 ▲그룹 위상 ▲리더십 ▲경륜 ▲건강 ▲대외 활동성 ▲사회적 평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돼 왔다. 전경련 측은 “임시총회에 앞서 2주 간의 공고 기간을 거친 뒤 추대와 선임 과정을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전경련의 새 회장 인선 작업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물망에 오르내리는 후보들이 하나같이 손사래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인물난’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부회장단 17명으로 모두 후보군이다. 이중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빅4’가 주목받고 있다.

비실세 회장의 한계를 넘어 과거 막강한 전경련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선 ‘힘 있는’총수로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어서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모두 고사 입장을 밝히고 있는 탓이다. 이건희 회장은 1990년대부터 수차례에 걸쳐 전경련 회장직을 제의 받았으나 매번 거절했다. 앞서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은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히며 이 회장을 강력 추천했지만, 이 회장은 강 회장을 비롯한 전경련 회장단 및 고문을 만나 정중히 거부했다.
 
이번 회장직 수락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측은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며 “전경련이 설사 추대한다 하더라도 회장직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건강 문제도 있다. 이 회장은 1999년 림프절에 암세포가 발견돼, 삼성서울병원에서 한차례 수술을 받았다. 이후 그는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왔다.

이 회장은 미국 휴스턴 엠디앤더슨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받고 있다. 주치의도 1주일에 한 번씩 서울 한남동 자택에 들러 이 회장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전경련 회장 자리의 특성상 이 회장에게 무리일 수 있다는 얘기다. 암 수술 후 5년이 지나면 재발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과로나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치의의 권고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번 고사 때도 “개인적으로 건강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입장을 전경련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4월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 이 회장은 지난 3월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2007년 1월부터 전경련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부회장단 17명 물망
“생각 없다”일축

이 회장과 함께 유력한 차기 전경련 회장으로 꼽히는 정몽구 회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정 회장은 전경련 회장직을 맡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회사일로 바빠 회장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 하마평에 오르는 것조차 부담스런 눈치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정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을 의사가 전혀 없다”며 “앞으로 그룹 경영에만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본무 회장은 10년 넘게 전경련에 발길을 끊고 있다. ‘반도체 빅딜’과정에서 생긴 앙금 때문이다. DJ 정부 시절인 1998년 빅딜을 통해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현 하이닉스)에 넘긴 것을 계기로 냉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당시 한 외국계 컨설팅 업체가 LG그룹의 반도체 사업을 접도록 빅딜의 방향을 정하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 업체를 추천한 곳이 바로 전경련이었다.

이를 계기로 구 회장과 전경련은 불편한 관계가 됐다. 반도체 사업을 빼앗기는 데 전경련이 한몫을 했다는 게 구 회장의 판단이다. 구 회장은 그 뒤로 단 한 차례도 전경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재계 총수들과의 만남도 자제해 왔다. 따라서 구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는다는 시나리오는 한마디로 희박하다. LG그룹은 2007년 펴낸 창립 60주년 사사에서 “강압적 분위기에서 반도체 사업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며 “이 과정이 이뤄진 1998년은 혹독한 아픔의 시간이었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세대교체론 힘 실려 50대 총수?
‘연장자 전통’따라 정몽구 회장? 
외부 영입·전문경영인 깜짝 등용?


이제 막 50대인 최태원 회장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어 아직 전경련 회장직을 맡기엔 이르다. 연륜·경륜을 중시하는 재계 풍토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전경련 역대 회장들의 연령대는 60대 이상이었다. ‘빅4’가 빠진다면 재계 10∼20위권 안팎의 그룹에서라도 리더십과 추진력을 갖춘 총수가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2군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 강덕수 STX그룹 회장 등이다. 그렇다고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 회장과 비슷한 연배인 김승연 회장, 신동빈 부회장, 이웅열 회장 역시 나이가 걸림돌이다. 이들은 모두 50대다.

다만 전경련의 세대교체론이 힘을 받을 경우 등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양호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1년 앞둔 동계올림픽 유치에 ‘올인’하고 있어 한눈 팔 틈이 없다. 2007년 전경련 회장 선출 당시 ‘70대 회장 불가’를 주장했던 이준용 명예회장은 스스로 선을 그었다. 이 명예회장은 “전경련 회장직을 맡을 뜻이 없다”며 “이번 기회에 전경련의 세대교체를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기 회장은 조 회장 선임 때 전경련 운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해 전경련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하다. 김 회장은 당시 전경련 부회장단에서 사퇴할 뜻을 내비쳤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까지 명단에 올라있다. 이밖에 허창수, 박용현, 강덕수 회장 등은 지난해 전경련에 합류해 회장직에 나설 만한 ‘서열’이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예전 같지 않은 위상
별 도움이 안 된다

총수들이 ‘재계 대통령’자리를 고사하는 이유는 전경련의 예전 같지 않은 위상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경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5·16 직후인 1961년 7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를 모방해 조직됐다. 당시 전경련은 정부의 대형 국책공사 물량을 분배하고, 업체 간 과당경쟁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또 새로운 경제 정책이 나올 때마다 재벌을 대신해 정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때문에 전경련을 방패삼아 ‘등에 업고 있는 짐’을 떨쳐 버릴 심산으로 회장직을 맡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달라졌다. 전경련은 과거 같지 않다. 급변하는 경영환경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란 지적이 많다. 주요 현안에 대해 재계 의견을 수렴해 정부에 전달하는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엔 전경련을 조용한 절에 비유한 ‘전경사’란 신조어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총수들이 전경련 회장을 맡는 것에 부담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전경련 회장으로 나서는 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진 것. 이는 파워 있는 총수들의 손사래로 이어졌다. 전경련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초대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등 당대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총수가 이끌어 왔다.

이후 1999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물러나고 중견그룹에서 회장이 나오면서 전경련의 위상 추락이 가시화됐다. 실제 김 전 회장을 마지막으로 국내 5대그룹에서 회장을 맡은 적이 없다. 김각중 회장(26·27대), 강신호 회장(29·30대), 조석래 회장 (31·32대) 모두 재계 서열 30위권 밖의 기업 출신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전경련의 위상은 누가 회장이 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굵직한 인물이 전경련을 이끌어야 한다”며 “무용론과 합병론이 나오는 등 전경련의 위상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어 이번에는 반드시 ‘힘 있는’총수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회장 구인난’은 이번만이 아니다. 그동안 회장 선임을 놓고 매번 난항을 겪어왔다. 조 회장이 2007년 강신호 회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을 당시에도 그룹 총수들이 모두 고사했었다.

전경련 정관에 따르면 적임자가 없을 경우 차기 회장직은 연장자가 맡는다. 이에 따라 정몽구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떠맡을 수도 있다. 정 회장은 1938년생으로 회장단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이준용 회장과 동갑이지만 정 회장이 생일이 빠르다. 김각중 경방그룹 회장은 1999년 추대 후보가 없어 연장자 전통에 따라 회장에 올랐다.

강신호 회장도 2003년 최연장자 자격으로 전경련 회장 업무를 수행하다 이듬해 2월 정식 선임됐다. 재계 일각에선 외부 영입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경련은 1989년 고 유창순 전 국무총리를 영입했었다. 이와 함께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CEO)의 깜짝 등용도 점쳐진다. 손길승 SK그룹 명예회장은 2003년 2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전경련 지휘봉을 쥔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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