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원정 첫 16강 도전 나선 허정무 감독

2010.06.01 10:44:42 호수 0호

호랑이군단 조련사 진돗개 “즐겁고 유쾌한 축구 보라”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 감독이 할 일은 없다’는 속설은 이미 옛말이다. 경기 중 감독의 판단 하나에 승패가 좌우될 만큼 감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온 것. 8번째 월드컵을 앞둔 한국팀의 키를 잡은 것은 허정무 감독. 그에게 축구는 투쟁이자 삶 그 자체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볼을 차던 그가 지금 남아공월드컵에서 즐겁고 유쾌한 축구를 하겠다며 나섰다. 20년이 넘는 축구지도자 인생에서 터득한 ‘여유의 리더십’이다. <일요시사>는 남아공월드컵으로의 출항을 앞두고 있는 허정무 감독의 ‘축구외길인생’을 돌아봤다.


모든 포지션 소화, 원조 멀티 플레이어
악착같은 플레이로 ‘진돗개’ 별명 얻어

     
1955년 1월13일 허정무 감독은 전남 진도군 의신면 초사리에서 의동초교 교장선생님댁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삼촌뻘이었던 축구 국가대표 허윤정의 권유로 목포중을 졸업한 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가진 것이라곤 트레이닝복 한 벌과 운동화·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눈 내리던 1967년 1월17일. 153㎝ 단신의 진도 촌놈은 축구를 시작한다. 선배들의 빨래를 도맡고, 새벽까지 개인훈련을 하던 그는 3개월만에 주전을 따냈다.

브라질 대표선수 자일징요처럼 되고 싶던 그는 고향 진도를 대표하는 ‘진돗개’로 불렸다. 끝내 상대를 제압하는 악착같은 플레이와 지능적인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영등포공고-연세대를 거쳐 국가대표로 발돋움했다. 대표팀에서도 그는 눈에 띄는 활약을 했다. 그러던 중 그를 눈여겨보던 네덜란드 PSV는 그에게 입단을 제의 했다. 허 감독은 계약을 체결했고 그길로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네덜란드에서 ‘융(Jung)’으로 불리던 그는 3∼4개월간 출전기회를 얻지 못하다 나선 위트레흐트전에서 ‘패스의 달인’ 판 하네겜을 이겨내며 주전을 꿰찼다.
또 라이벌 아약스에서 뛰고 있던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와 세 차례 맞대결에서 완승을 거뒀다. 허정무를 이겨내지 못한 크루이프는 끝내 팔꿈치로 그를 가격하고 말았다.

“허정무는 훌륭한 선수였다”는 크루이프의 발언 때문에 허정무는 더욱 유명세를 탔다. 게다가 1982년엔 트벤테전에서는 수비수 3명을 제치고 결승골을 터트리며 에인트호번을 UEFA컵에 진출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허 감독은 1980년부터 3년간 왼쪽 날개와 중앙 미드필더로 77경기에 나서 15골을 뽑아냈다. 2년간 더 재계약하자는 에인트호번 구단의 제안을 물리치고 그는 1983년 귀국했다. 한국에 프로축구가 발족했기 때문이다.

그가 막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을 무렵 고 함흥철 대표팀 감독은 그를 ‘진도’라고 불렀다. 함 감독은 그에게 종종 “잘하면 진돗개가 되지만, 못하면 똥개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가대표 허정무는 진돗개가 되고 싶었다. 1978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대회 이라크전 도중 고환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네 바늘을 꿰맨 그는 자청해서 결승전에 출전, 끝내 우승을 거뒀다.

그가 얼마나 집념이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국가대표팀 멀티 플레이어의 원조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3년간 A매치 87경기에 나서 30골을 뽑았다. 공격수를 전담하지 않고도 30골(역대 5위)을 뽑아낸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그는 멕시코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뽑아냈고, 서울 아시안게임을 우승시킨 후 영예롭게 은퇴했다.

비난 속에 떠난 허감독
7년 만에 태극마크 달아



이후 허 감독은 선수시절의 경험을 살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트레이너로 1994 미국 월드컵에선 코치 등으로 국제무대 경험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8년 대표팀,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허 감독은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 등 주요 대회를 지휘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개최국 태국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8강에 머물렀다.

시드니올리픽 본선 조별리그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2승을 올리는 성과를 올렸지만 골득실차에서 밀리면서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시안컵에서도 3위에 머물며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결국 허 감독은 세인들의 모진 비난을 뒤로한 채 대표팀에서 떠나게 된다. 그리고 2007년 그는 다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게 된다.

이후 근성과 투지를 강조하던 허정무 감독의 지도 철학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과학적이면서 합리적인 축구에 눈을 뜬 것. 이 때 등장한 것이 허 감독의 또 다른 상징인 ‘바둑’이다. 바둑은 상대의 수를 생각하고 이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두뇌 싸움이다. 아마 4단인 허 감독은 축구계에서 바둑 고수로 정평이 나 있다. 상대의 흐름을 적절히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최고의 전술 중 하나다.

지난 2007년 12월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허 감독이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본선의 전략으로 ‘아생연후살타(내 집을 먼저 살려놓고 상대를 잡으러 나간다)’라는 바둑의 전략을 들고 나온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허 감독의 변화된 생각은 대표팀의 분위기를 180도로 바꿔놓았다. 지난 2008년 1월 대표팀 소집 당시 일부 선수들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남아공월드컵서‘유쾌한 축구’ 하겠다”
근성에 생각을 더해… 진화하는 지도철학


전남 드래곤즈 시절 운동량이 많았다는 소문만 듣고 ‘죽었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소집 시간보다 훨씬 일찍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 입소하는 선수들이 부지기수였다. 예상대로 훈련량은 많았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허 감독의 의도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비판이 쏟아졌다. 이런 위기감 속에 허 감독은 변화의 시도가 없으면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허 감독은 선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소통하는 감독으로 변해갔다. 박지성을 주장으로 선임한 뒤의 대표팀 분위기 변화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과거 대표팀 버스에서는 정적이 흘렀지만 최근에는 음악 소리와 선수들의 수다가 넘쳐난다. 이는 선수대기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이 피곤한 기미라도 보이면 휴식을 충분히 보장하기도 한다. 그는 축구선수와 감독으로서 ‘실크로드’를 걸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허 감독은 부인 최미나 씨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1975년 <가요 올림픽>이라는 쇼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허정무)과 MC(최미나)로 처음 만난 허 감독 내외는 1978년부터 비밀연애를 시작했다. 당시 허 감독의 봉급은 10만8000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최미나씨의 봉급 300만원에 크게 못 미쳤다. 게다가 최씨의 집안에서는 “팬티 입고 뛰는 사람한테는 딸을 안 준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리어카를 끄는 한이 있어도 안 굶길 자신이 있다”는 허 감독의 배짱에 결국 ‘스포츠-연예 스타’로선 처음으로 화려하게 결혼에 골인했다. 이후 그녀는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감독으로 거듭날 수 있게 전심전력했다. 특히 한국대표팀의 시합 다음날 디스크수술 일정을 잡고도 허 감독이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수술사실을 비밀로 했다는 일화는 그녀의 ‘살신성인’을 대변한다.

한국대표 선수·감독
배경엔 아내의 내조

이와 같은 아내의 내조에 대답이라도 하듯 허정무 감독은 “국내 감독에 대한 편견을 깨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선수들이 부담 없이 월드컵을 즐기길 바라면서 ‘유쾌한 도전’을 모토로 내걸었다. 자신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말임과 동시에 믿음으로 대표팀을 성원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달 24일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쾌승을 거두면서 성공적인 첫발을 뗀 한국 축구. 남아공월드컵에서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어떤 결과를 낼지 주목된다. ‘근성’에 ‘생각’을 보태 자신만의 지도 스타일을 창조하고 있는 허정무 감독. 지금은 그를 믿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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