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⑤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2014.12.29 11:59:45 호수 0호

해외로 튀어 8년째 감감무소식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무려 40조원에 달했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법인은 10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5화는 28억5100만원을 체납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하 정태수)은 1997년 1월부터 주민세 등 78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징수할 체납액은 28억5100만원이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정태수는 1992년부터 증여세 등 73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누적된 체납액은 무려 2225억2700만원이다.

합쳐서 3000억

정태수는 국세청이 매년 공개하는 고액 체납자 명단 맨 꼭대기에 10년째(2004∼2013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주요 일간지들은 매년 12월만 되면 "정태수가 2000억원을 체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태수가 실제로 체납한 세금은 3000억원이 넘는다.

정태수의 차남 정원근(46)씨는 1997년부터 종합소득세 등 모두 40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국세청이 징세할 체납액은 35억6800만원이다. 3남 정보근(44)씨는 1997년부터 증여세 등 모두 13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체납액은 644억6700만원이다. 4남 정한근(42)씨도 1997년부터 증여세 등 15건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한근씨가 체납한 세금은 293억8800만원이다.

정태수 일가가 떼먹은 세금은 국세청 기준으로만 3199억5000만원에 이르렀다. 여기에 배다른 자식인 장남 정종근(60)씨가 체납한 세금,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거둬갈 세금까지 더하면 실제 체납액은 3300억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를 징세할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정태수는 해외로 도피한 뒤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보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정태수가 해외자원개발로 재기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정태수의 나이는 올해로 91살이다. 정태수를 실제로 만났다는 사람은 키르기스스탄에 있었다. 그와 접촉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정태수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태수는 2006년 그가 설립한 강릉영동대학교의 교비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정태수는 항소심 재판 중 치료를 핑계로 해외로 출국했다. 우리 사법당국은 정태수의 도피를 눈뜨고 지켜봤다. 정태수는 2007년 일본을 경유해 카자흐스탄으로 날아갔다.

정태수의 카자흐스탄행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2005년부터 "해외유전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언론에 떠벌렸다.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HB관리'라는 곳이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유전개발 제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HB관리는 경비인력 10명을 관리했던 회사로 자원개발과는 아무 상관없는 용역업체였다. 월급 총액은 800만원가량이 지급됐는데 이런 회사에 강릉영동대는 용역비로 매달 3000만원을 몰아줬다. 남은 2200만원은 정태수의 용돈과 다름없었다.

이 무렵 정태수는 수행 비서를 두고 벤츠를 몰았다. 도피 전까지 서울 가회동 저택(2층 건물)에 살며 월세로만 4억8000만원을 지불했다. 출국금지가 돼 있었지만 미국·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도 오갔다고 한다. 그런데도 과세당국은 손 놓고 있었다. 정태수 앞에 법은 무기력했다.

일가 체납액 3300억…소재 파악 안돼
영동대 잇단 불법에도 국고 환수 못해

정태수는 2003∼2005년까지 강릉영동대에서 모두 72억원을 횡령했다. 빼다 쓴 20억원은 회사 운영비로 탕진했다. 10억원은 소송비와 생활비로 남용했다. 강릉영동대 운영법인인 정수학원은 정태수 일가의 사유재산이다. 하지만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일가가 소유한 만강학원처럼 이를 강제환수할 법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장남 종근씨는 2012년 현모 당시 이사장을 상대로 "학교 운영권을 내놓으라"며 강릉영동대에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정태수는 해외로 도피하면서 자신의 간호업무를 위해 간호사를 4명이나 고용했다. 강릉영동대는 이들을 교직원으로 허위 채용해 급여를 지급했다. 이를 주도한 셋째 며느리 김정윤씨는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을 확정판결 받았다. 당시 김씨는 남편 보근씨의 수행비서에게 2180만원의 급여를 교비로 지급했다. 카자흐스탄으로 간 시아버지(정태수)에게도 2920만원을 불법 송금했다. 또 김씨는 교비 6630만원을 사적으로 유용했고, 보근씨에게도 4400만원을 건넸다.

2013년 3월 보근씨는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최근 보근씨는 부동산 개발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밀린 세금을 냈다는 얘기는 지금껏 들리지 않는다. 서울시를 상대로 "땅을 갖게 해달라"며 소송을 벌였다는 소식만 확인된다.

서울 송파구 장지동 일대 3만2000여㎡(약 9700평) 개발 부지를 놓고 정태수 일가는 2012년 환매권을 행사하려 했다. 환매권이 행사되면 시가 1000억원으로 평가받는 땅을 '단돈' 200억원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법원은 "환매대금을 정해진 납부기한 내에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국세청과 서울시는 장지동 땅을 동시에 압류했다.


정태수 일가의 숨겨진 재산은 장지동 땅만이 아니었다. 서울시가 강제등기한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 땅 2000여㎡는 감정가 394억원으로 올 6월 공매에 나왔다가 유찰됐다. 1978년 31평형 매입가가 2000만원이었던 은마아파트는 현재 시세가 8억∼10억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강남 개발로 정태수가 챙긴 이득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정확히 가늠되지 않고 있다.

인천, 경기도 용인, 안산, 충남 당진 등 그동안 언론이 확인한 땅만 10만평이 넘었다. 정태수가 부동산 개발을 염두에 두고 매입했던 땅들이다. 2005년 법원경매 기록에 등장한 용인 땅 가운데는 용도가 학교부지였던 곳도 있었다. 학교 운영을 핑계로 땅장사를 하려했던 정태수 일가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다.

그들은 해외로도 돈을 숨겼다. 러시아 천연가스전 개발사업권을 매각한 뒤 남은 돈을 차명으로 스위스 은행에 예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 자원개발에 참여했던 4남 한근씨는 전체 매각 대금(5790만 달러) 가운데 3270만달러(한화 323억여원)를 페이퍼컴퍼니를 경유해 빼돌렸다. 한근씨는 미국 등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막대한 부동산

정태수는 지난 2008년께 한국에서 범죄인 인도요청이 이뤄지자 옆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도주했다. 현지 고려인의 도움을 받아 '정수'라는 유한회사를 설립한 것이 서류상 확인되는 마지막 행보다. 도피 중에도 정태수는 한국으로 팩스를 보내 강릉영동대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 변함없는 '노욕'을 부렸다. 차남 종근씨가 키르기스스탄 광산 사업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 또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태수 일가의 해외도피를 방관한 당국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angeli@ilyosisa.co.kr>

 

[한보그룹은?]

▲1974년 한보상사 설립
▲1979년 은마아파트 분양, 한보종합건설(초석건설) 인수
▲1984년 금호철강(한보철강) 인수
▲1991년 수서비리 사태
▲1995년 당진 제철소 건립 추진
▲1997년 그룹부도 및 한보사태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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