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자백 사건의 오해와 진실

2014.09.22 11:58:29 호수 0호

김기춘의 진짜 역할은 무엇이었나

[일요시사 정치팀] 허주렬 기자 = 한국 현대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꼽히는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의 범인은 재일한국인 문세광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 문세광의 자백을 중앙정보부장 법률보좌관을 맡고 있던 김기춘 검사(현 청와대 비서실장)가 소설 <자칼의 날>을 이용해 받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일요시사>에 ‘문세광 자백 사건은 잘못 알려져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김 실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추석연휴가 끝난 직후 <일요시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기자가 쓴 ‘박근혜, 김기춘 못 버리는 세 가지 이유’라는 기사의 일부 구절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의 전화였다. 자신을 소설가 황천우라고 밝힌 그는 “김기춘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친 육영수 여사를 피격한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구절이 잘못됐다”며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김 실장이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실장 본인도 과거 복수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육영수 피습

2005년 1월 노무현정부가 공개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문건에 따르면 문세광은 1972년 9월 조총련 간부 김호룡에게 포섭돼 북한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고 1974년 7월 일본 오사카 소재 파출소에 침입해 권총을 훔쳤다.

그해 8월6일 훔친 권총을 가지고 항공편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열흘 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29주년 광복절 행사 도중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에게 총격을 가해 숨지게 했다.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법률보좌관이었던 김기춘 검사는 사건 발생 다음날인 16일 오후 신 중정부장의 지시에 따라 문세광 조사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김 실장은 2005년 1월21일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중정부장 보좌관으로서 8·15광복식장에서 그 사고가 나자 문세광이 중정 수사팀에 인계돼서 왔는데, 심문을 받고도 그 다음날인 8월16일 오후 5~6시경까지 묵비하고 일체 질문에 답을 안 했다. 그러니까 당시 (신직수) 부장께서 나에게 혹시나 하고 한번 수사팀에 합류해서 말문을 열도록 신문을 해보라고 해서 수사에 참여해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쓴 소설 <자칼의 날>로 말문을 열게 해 그날 밤 자백을 이끌어냈다.”

<자칼의 날>은 프랑스의 비밀 군사조직이 자칼이라는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내용을 담은 대표적 테러·공작 소설로 문세광이 즐겨 읽었던 책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황천우 작가는 김 실장의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황 작가는 <일요시사>에 보낸 자료와 통화에서 “사건 발생 직후 김일두 서울지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김 본부장은 문세광의 자백을 근거로 당일 밤 11시30분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다음날 오전에는 문세광의 사상성분과 학·경력 그리고 가족상황 등 세밀한 부분까지 자백을 받았다는 내용의 2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이 문세광과 대면하기 이전 수사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자칼의 날> 이용한 문세광 자백은 허구?
김기춘-문세광 만남 전 순조롭게 수사 진행

실제로 1974년 8월16일자 <조선일보>에는 사건의 배후, 경위, 문세광의 사생활 등이 상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한술 더 떠 1974년 8월15일 <동아일보>에 박경석 주일 특파원이 송고한 기사에는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은 일본에 귀화한 문세광, 일명 문세웅으로 알려졌다”는 글귀를 시작으로 문세광의 주소, 직업, 한국입국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당시 <동아일보>가 석간이었다는 점과 기사 마감시간을 고려한다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기사를 송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국내에서는 공식적으로 범인이 문세광임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사건 당일 오전 중정 직원이 문세광이 묵던 조선호텔에 나타나 방에 있던 그의 물건들을 압수해 가기도 했다. 종합하면 사건 발생을 전후해 중정은 이미 문세광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일부 보수언론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문세광이 묵비권을 행사했고, 또 최초로 문세광의 자백을 이끌어냈다는 김 실장의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에 대해 황 작가는 “김 실장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문세광으로부터 자백을 받기 위해 수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라며 “당시 신직수 중정부장이 수사방향에 관한 모종의 지침을 주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심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한몫하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북한은 남한에 대한 이른바 꽃놀이패를 쥐고 있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의 부당성을 들어 북한은 남한을 상대로 남북조절위활동, 심지어 남북적십자회담까지 중단하겠다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과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관계가 좋지 못했고, 내부적으로는 유신반대 학생운동이 늘어나고 있던 터였다. 박정희정권이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이 프로암살자도 아닌 권총사격 경험이 전무한 문세광을 사주해 박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실제로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5발의 총알은 모두 자신의 의지대로 가지도 못했다. 일탄은 자신의 장딴지에 발사했고, 이탄은 연단, 삼탄은 불발, 사탄은 대응사격을 취하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겨냥했지만 육영수 여사의 머리, 오탄은 국기에 맞았다.

문세광의 테러과정을 봐도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행사 전날 갑자기 청와대 경호실에서는 경비 완화 지시가 내려졌다. 심지어 경호실장 지시하에 몸수색을 하지 말라는 명도 내려졌다는 당시 경호관의 증언도 있다. 이와 같은 경호실의 조치는 초청장도 비표도 없었던 문세광이 행사장에 권총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굿판의 저주?

이러한 정황들을 근거로 황 작가는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문세광이란 꼭두각시를 내세워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한 굿판이었다. 그런데 그 굿판에서 안타깝게도 저주가 발생해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명을 달리했다”며 “김기춘 실장에게 이 사건 조사에 참여하게 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김일성이 문세광에게 ‘박정희 암살지시’를 진짜로 내렸는지를 묻고 싶다”고 말했다. 과연 묻히고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carpediem@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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