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땐 “고마워” 갚을 땐 “죽어줘”

2010.01.26 09:10:00 호수 0호

미제사건 될 뻔한 경북 사채업자 암매장 범죄재구성

변제기일 다가오며 커지는 두려움 살해 암매장 선택
해외도피 생활…거짓말탐지기 앞에 완전범죄 ‘와르르’



빌린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사채업자를 살해한 일당이 덜미를 잡혔다. 무려 8년 만이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들은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해외에서 도피생활까지 했지만 거짓말 탐지기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굴착기로 파헤친 야산에서 백골이 된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미궁 속에 빠질 뻔했던 사건은 종지부를 찍었다. 돈 때문에 사채업자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뒤 도피행각을 벌였던 일당의 지난 8년을 재구성했다.

지난 16일 경북 군위군의 한 야산. 굴착기가 산의 한 부분을 파자 부직포에 싸여 끈으로 묶인 물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직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시신 한 구. 낡을 대로 낡은 부직포와 끈은 시신이 매장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줬다.

시신의 주인공 최모(당시 39세)씨가 사망하고 암매장된 것은 8년 전. 사채업자였던 최씨를 살해한 것은 최씨에게 돈을 빌린 이모(54)씨 일당이다. 공장을 신축하는 데 돈이 필요했던 사업가 이씨는 지난 2001년 6월 평소 알고 지내던 최씨에게 6억원을 빌렸다. 그는 이 돈 가운데 2억원을 사용했다.

암매장까지 일사천리

그러나 돈을 갚을 길이 막막했던 이씨는 약속한 변제기일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이에 이씨는 돈을 갚지 않을 방법을 고심하다 범행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최씨를 살해해 남은 4억원까지 가로채겠다는 것.


이씨는 살인을 도와줄 사람을 찾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모(56)씨 등 2명을 범행에 끌어들였다. 남은 돈 4억원을 3등분해 1억3000만원씩 나눠 갖자는 조건이 붙었다. 이에 동의한 박씨 일당은 이씨와 치밀한 범행을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들이 범행날짜로 잡은 2001년 6월30일 오전 10시, 경북 경산시 자인공단 내 박씨의 섬유회사 사무실에 최씨가 나타났다. 그리고 미리 공사현장에서 쓰는 곡괭이를 준비한 일당은 최씨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이후 이들 3명은 비닐하우스용 보온덮개로 쓰는 부직포로 최씨의 시신을 싼 뒤 차에 싣고 사무실을 떠났다. 이들이 향한 곳은 경북 군위군 고로면 학암리 지방도로 옆 계곡. 이곳에서 이들은 최씨의 시신을 암매장한 뒤 달아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비명횡사한 최씨는 결국 실종신고가 됐다. 경찰은 최씨가 살해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용의자를 찾다 이씨 일당에게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했다. 먼저 최씨가 실종되기 직전 이씨가 최씨에게 빌린 돈 4억원을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꾼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씨는 이날 현금으로 바꾼 돈을 최씨에게 갚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결과 이씨가 돈을 건네기 위해 최씨를 만났다는 장소에 최씨는 간 적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 하나는 이씨와 박씨 등 3명이 사건이 발생한 2001년, 나란히 이혼을 한 뒤 필리핀 등 해외로 나갔다는 점이다. 도피성 외유로 보이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력한 용의자들이 국내를 떠났고 수사는 중단됐다.

그리고 이 사건이 다시 경찰의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지난 2009년. 장기실종 미제사건 전담팀을 꾸려 관련 사건들을 재수사하던 경찰은 지난해 8월 이 사건에 대한 재검토를 시작했다.

진상은 의외로 쉽게 드러났다. 이씨 등 용의자 세 명에 대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하기로 한 날 일당 중 한 명이 잠적한 것. 이에 경찰은 용의자들을 추궁했고 자수와 동시에 범행 일체를 자백해 진실이 드러났다.

경찰은 “장기 미제 실종 사건을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압박을 느낀 이씨가 모든 걸 자수해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대구 달서경찰서는 지난 18일 이씨 등 3명을 살해혐의로 구속했다.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사채업자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는 채무자들의 사건은 이 사건 외에도 종종 발생했다. 한 사채업자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채무자들에게 범행을 저지르는 사채업자들도 많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이 일어난다”며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변제날짜가 다가오면서 압박을 느끼는 채무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 채권자를 살해한 일당이 덜미를 잡혀 중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보험판매업체를 운영하는 김모(43)씨 등 2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오모(당시 42세)씨에게 1억원을 빌렸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에도 이들은 오씨에게 돈을 갚지 못했고 오씨는 6개월간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이에 압박을 느낀 김씨 일당은 오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난해 4월28일 오후 11쯤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에 있는 사무실로 오씨를 유인한 뒤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하고 충북 청원군의 한 야산에 암매장했다.

채무 면탈 목적 살인행각

이들은 결국 중형을 선고받았다. 청주지방법원은 지난해 11월 김씨 등 2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피해자가 채권을 변제받기 위해 찾아올 것을 알고 범행도구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시체를 유기할 준비까지 한 후 채무 면탈을 목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면서 “죄질이 아주 불량하고 죄책이 무겁다”고 판시했다.

또 “피고인들은 책임을 면하거나 줄이기 위해 말을 맞추고 진술을 번복하는 등 유가족에 대한 피해회복 노력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다”면서 “피해자가 변제를 독촉하며 협박을 해 심적 고통을 겪었더라도 이 범행을 정당화할 사유는 결코 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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