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큰 어른을 잃었다는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 번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이 생전 머물렀던 일산자택이 최근 세금체납으로 국세청에 압류된 것이다. 일산자택은 DJ가 정권 재기에 성공해 대권까지 거머쥔 곳으로 역사적 상징성을 자랑하는 공간이다. 비록 3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인근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당시 DJ의 모습을 추억하며 더욱 안타까운 심정을 전하고 있다. <일요시사>가 그 현장을 찾았다.
재미사업가인 현 소유주 세금 체납으로 국세청 압류
경매 넘어갈 수도…인근 주민들 “나라가 지켜야지”
경기도 고양시 정발산 산기슭 아래에는 소위 일산의 ‘베버리힐스’로 불리는 전원주택 단지가 있다. 방송인 양희은씨 등 유명인들이 많이 거주하기로 소문난 이곳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자택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달 28일, 기자가 직접 찾은 동네는 마치 유럽의 한 부촌마을을 연상케 했다. 푸른빛의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화이트톤의 유럽식 목조건물이 즐비한 주택단지는 외국영화에서 자주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DJ, 귀국 후 동교동
떠나 정발산 기슭으로
인근에 위치한 정발산 덕분인지 쾌적한 공기가 감싸던 단지 한쪽에 DJ가 생전에 머물렀던 자택의 모습도 보였다. 대부분의 주택이 유럽풍인 가운데 기와를 올린 DJ의 자택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두 필지에 위치한 자택은 1327-7번지에 위치한 부지면적 220㎡에 연면적 327㎡로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과 1327-6번지에 지하 1층~지상 1층 규모로 지어진 일종의 ‘별관’으로 이뤄져 있다.
2층 양옥 건물에 전통 기와를 올려 한옥의 느낌을 살린 DJ의 자택은 한때 호화주택이란 여론의 화살을 맞았던 것과는 달리 평범한 모습이었다. 나뭇결 느낌을 그대로 살린 대문 안쪽에는 작은 잔디정원이 있고 주변에는 정갈한 느낌의 소나무 몇 그루만 자리했다. 인근의 한 주민은 “DJ의 평소 모습을 닮은 듯 자택도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이라고 전했다.
DJ는 이 자택에서 1995년 귀국 후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 취임 직전까지 약 3년간 머물렀다. 그러나 짧은 기간 거주했던 일산자택은 DJ 정치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한때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떠났던 영국 유학길 이후 화려하게 정계 복귀를 이루고 DJ의 숙원이었던 대통령의 꿈을 이룬 곳도 바로 이곳에 머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DJ는 이 집에 거주하면서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1997년 11월 대선 승리를 견인한 ‘DJP연합’을 구상했으며 결국 대통령에까지 당선됐다.
3년간 머물며 정계복귀
10년 전 지인에게 매각
그러나 최근 이 자택이 세금 체납을 이유로 국세청에 압류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법원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국세청 고양세무서는 지난달 11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1327-7번지의 부지(220㎡)와 2층 건물로 이뤄진 DJ의 옛 일산자택을 압류했다. 국세청은 현 소유주인 재미사업가 조풍언(69)씨가 여러 차례의 독촉에도 수백만원대의 세금을 내지 않아 집을 압류했다.
더구나 해당 자택은 이미 지난해 7월 검찰에 의해서도 가압류 조치되어 있는 상태다. 조씨가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구속돼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과 벌금 172억원을 선고받아 추징금 확보를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다. 등기부에 기재된 가압류 청구금액은 301억8663억원이다. 결국 조씨가 벌금과 밀린 세금을 내지 못할 경우 이 자택은 경매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당선된‘역사의 산실’ 추징금에 세금까지‘이중압류’
10년 전 6억원 매각 현 시세 20억원 추정
DJ와 오랜 친분이 있는 조씨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비어있던 자택을 지난 1999년 7월 6억8000만원에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 따르면 그동안 조씨는 한 여성을 고용해 자택 관리를 맡겼지만 지금은 하지 않고 있어 구청이 따로 관리하고 있다. 압류 소식을 전해들은 일산의 인근 주민들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한 주민은 “일산자택이 국세청에 압류돼 경매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곳은 DJ가 거주하면서 정치적인 성공을 이뤄낸 역사적인 장소인데 안타까운 일이 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도 “DJ의 자택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단아한 주택의 모습이 사라질 수도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건물은 폐허가 되더라도 나라가 나서서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산자택은 DJ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민주정치의 승리를 일궈낸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안타까움을 전하던 주민들은 DJ가 이웃으로 머물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13년째 인근에서 거주해 온 한 주민은 “한때 이웃주민으로 살았던 DJ의 모습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며 “특히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엔 수십 명의 경호원과 취재진들이 북새통을 이뤄 조용한 동네가 한동안 시끌벅적 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그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DJ가 머물던 시절에는 경호가 확실해 동네에 잡음이나 범죄가 전혀 없어 살기 편했다”며 “DJ가 청와대로 떠나자 한동안 좀도둑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소박했던 이웃 DJ
곳곳에 추억 남아
주변을 산책 중이던 한 주민은 DJ의 집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는 “DJ는 유명한 정치인임에도 늘 소박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DJ는 가끔 집 앞 계단에 내려와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며 “나라의 큰 어르신이었던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불미스런 일이 겹쳐 마음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직접 DJ 자택의 길 안내를 도와준 한 주민은 “주민들 사이에선 DJ가 일산에 머문 뒤 일산의 땅값이 크게 올랐다는 말들이 전해진다”며 “DJ가 동교동에 머물 때에도 이루지 못했던 대권의 꿈을 일산에 오자마자 이뤄 명당이라는 소문이 퍼진 덕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DJ는 동교동에 머물던 시절 세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번번이 결실을 맺지 못했고 일산으로 자리를 옮긴 뒤 대권을 차지해 청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에 일부에선 일산자택의 터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몇몇 풍수지리가들은 일산자택의 터를 두고 “근래에 지은 주택 중에 보기 드문 대단한 명당터에 자리했다”며 “이 집의 지기(地氣)는 군왕혈급으로 명당 2급지 최상급”이라고 칭찬을 늘어놓기도 했다.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 중인 한 주민은 “DJ의 일산자택이 압류조치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세를 확인하는 언론사의 전화가 늘었다”며 “아직 경매로 넘어간 상황이 아닌데도 벌써부터 분주한 것을 보면 한때 이웃이었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 DJ가 머물던 자택의 시세는 18~20억원 정도지만 만약 실제 경매가 이뤄진다면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이 머물렀던 곳인 만큼 프리미엄이 붙어 높은 낙찰가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