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정치 거물들 사이에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섭섭잖게 ‘얻은’이가 있는가 하면 원하지 않았던 과거사가 들춰져 씁쓸한 속을 쓸어내리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득실은 과거 김 전 대통령과의 맺은 인연도 중요하지만 그와 마지막을 어떤 인연으로 마무리했느냐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좋지 않았던 인연도 한순간의 선택으로 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대북 메신저, 북한과 대화 기회 얻은 MB
울상짓는 박근혜 잊었던 ‘독재자의 딸’ 되살아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이는 누구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이 첫손에 꼽힌다. 후폭풍까지 염두에 두면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현재 그가 얻은 것이 적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 대통령은 DJ와 썩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민주진영의 큰 어른이었던 DJ와 한나라당 대선주자였던 MB의 교차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후 이들의 관계는 심하게 틀어졌다.
MB 비판했던 DJ
사후엔 선물 잔뜩 안겨
정부가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 당시 DJ의 추도사를 막았기 때문이다. DJ는 이후 ‘사람 사는 세상’ 사이트에 공개한 추도사에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며 “노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다. 우리 국민들은 억울해 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이어 “독재정권, 보수정권 50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DJ는 이후로도 이명박 정권을 ‘독재정권’이라 부르며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DJ의 병실을 찾아 “민주화와 민족 화해에 큰 발자취를 남긴 나라의 지도자이신 만큼 문병하고 쾌유를 비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며 “반세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다. 평생 동안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고비를 넘기실 수 있을 것”이라고 문병하면서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이 DJ의 국장을 결정한 것은 친서민정책으로 인한 효과와 더해지며 40%대의 지지율로 나타났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지난달 25일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율은 41.4%로 나타났다. 같은 기관의 전달 조사와 비교했을 때 긍정평가는 9.5% 상승하고 부정평가는 9.7% 낮아졌다.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에 대해 “경제가 안정되고 친서민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지지율이 오른 것”이라면서 “DJ 국장 요구 수용과 북한 조문단 접견 등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이 대통령은 지지율 상승을 기반으로 향후 국정운영을 추진할 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대통령이 얻은 가장 큰 이득은 남북관계의 화해모드다. DJ 서거로 북한은 특사 조문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대통령을 예방, 남북관계의 물꼬를 틀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으로 1년 6개월여 간 경색돼있던 남북관계에 한줄기 햇살이 비치기는 했으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뜻을 전하러 온 특사와 이 대통령이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의미가 컸다.
특사 조문단이 이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했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청와대가 곧 “이 대통령의 북한 조문단 접견에서는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있었을 뿐”이라고 일축하고 나서기는 했지만 특사 조문단의 청와대 예방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는 “우리 정부의 일관된 대북정책 기조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도와준다는 것, 인도적 지원은 열린 자세로 한다는 것, 언제 어떤 수준의 대화도 할 수 있으나 과거와 같은 방식은 안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남북관계에 모처럼 비친 햇살로 이 대통령의 대북정책 기조가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대화뿐 아니라 현 정부 들어 처음으로 적십자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1년 9개월 만에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양측 대표단은 오는 추석 무렵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재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이미 큰 틀에 합의하고 있기에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장관은 지원재개 시점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유엔기관을 통해 지원하되, 북한의 영유아나 질병에 대해선 민간기관을 통해서도 지원하겠다”는 지원절차를 전했다.
박진 국회 외통위원장은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북한의 핵실험 강행 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됐지만, 최근 개성공단 근로자 석방과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의 서울 방문 등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먼저 몸을 움직인 대가를 톡톡히 받아냈다. 김 전 대통령은 병원에 입원한 DJ를 찾아 화해했다. 이후 상도동계와 여권 인사들이 줄줄이 DJ를 병문환 하면서 화해의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DJ 서거 후 그는 유일하게 남은 정치 원로가 됐다. 전직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국민 여론 등으로 대외활동이 힘들기 때문이다. YS는 현실정치에 조언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 된 것. YS는 DJ와의 화해의 여세를 몰아 동교동계 인사들 끌어안기에 나섰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만찬 회동을 준비한 것. 약속 당일 김홍업 전 의원과 권노갑 전 의원, 박지원 의원이 상도동 자택을 찾아 “아직 애도기간이니 대규모 만찬은 연기했으면 한다”고 요청하고 YS가 “나도 다소 빠르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럼 새로 날을 받아서 하자”고 받아들이면서 미뤄지기는 했지만 ‘화합의 만찬’은 여전히 유효하다. YS는 “만찬 자리에서 4~5분 동안 추도사를 하려고 했다. 1984년 DJ와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을 논의했던 서울 남산 부근 외교구락부에서 회동을 가지려 했는데 그곳이 없어졌더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남은 정치권 큰 어른 YS
동교동계 끌어안기 적극적
이번 만찬 연기는 애도기간 중 대규모 모임을 피하자는 것 외에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모임이 정치적 해석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분간 이들의 화해 분위기는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의원은 만찬 연기로 양 계파간 화해분위기가 흐려지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특별히 정치 일선에서 어떤 경쟁이나 나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얘기를 하고 존경의 말씀을 나누면 된다”고 답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DJ 서거로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DJ의 생애와 업적이 주목받으면서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독재자’로, 박 전 대표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불렸던 과거가 되살아난 탓이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를 차리고 각종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천천히 걷었던 과거의 장막이 그를 뒤엎었다.
이는 박 전 대표가 현재 처한 상황과 이어지면서 타격을 키웠다. 박 전 대표는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특유의 정중동 행보가 흔들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표의 정치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원칙과 함축적인 말이 깨진 것. 또한 강릉 재선거에 출마할 친박계 인사의 선거 사무실 개소식을 찾은 것은 선거 개입 논란을 불렀다. 박 전 대표는 “의리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친박계 의원들을 대동한 움직임은 박심의 행방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DJ서거로 정치권 거물들 얻거나 혹은 잃거나
홀로 남은 정치계 대부 YS 동교동계 품어볼까
이 대통령의 선거구제 행정구역 개편 주장은 박 전 대표에게 가장 치명적이다. 중·대선거구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은 영남을 기반으로 한 한나라당에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영남 지역구 수가 호남보다 많고 영남권 민주당 지지율은 호남권 한나라당 지지율보다 높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은 친박계가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어서 선거구제 행정구역 개편이 본격화될 경우 박 전 대표의 지역적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이 대통령의 제안에 당 지도부가 “선거제도 및 행정구역 개편 등은 이 시대의 소명” “생산적 정치를 위해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행정구역 개편을 위해 이번 정기국회에서 법제화 작업을 시작하겠다”며 ‘총력 지원’에 나섰어도 당내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지지율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박 전 대표는 그동안 각종 차기 대권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압도적인 차이로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올해 초까지만 해도 40%대의 고공행진을 보이던 지지율은 20%대로 급감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미디어법 처리, DJ 서거까지의 굵직한 사건들마다 그의 지지율은 요동쳤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지난달 25일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26.4%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6월22일 조사에서의 29.5%와 비교하면 3.5% 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KSOI는 박 전 대표의 지지율 하락에 대해 “비한나라당 지지층 중 박 전 대표를 지지하던 세력 중 일부가 미디어법 정국의 박 전 대표 입장 변화 논란 과정에서 이탈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되살아난 ‘독재자의 딸’
“안 그래도 흔들리는데…”
정치권 한 관계자는 “그동안 박 전 대표는 여당에 속해있다는 점과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한나라당과 비한나라당 지지층 모두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여당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여권에 속했다’는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한나라당 지지층에서 박 전 대표를 지지하던 이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 DJ 서거를 계기로 돌아서면서 지지율 하락을 부추겼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