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특별기획③>DJ의 업적 & 못다 이룬 꿈

2009.08.25 09:22:46 호수 0호

DJ 손길 닿은 빈자리에도 ‘햇볕’ 비출까



민주·인권 위해 바친 삶, 한국 민주주의 주춧돌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으로 IMF 외환위기 극복
DJ 공과 모두 담은 ‘햇볕정책’·남북정상회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뒤로 그가 쌓은 업적과 미완의 과제가 주목받고 있다. 수많은 정치 역경 속에서 일궈낸 민주화와 평화적인 정권교체, IMF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으로 빛나는 남북관계에 대한 기여도가 그것이다. 이 중 김 전 대통령이 서거 전까지 원하던 남북의 평화 통일과 지역갈등의 해결은 남은 이들의 과제가 됐다. DJ 서거를 계기로 그가 남긴 것과 남은 이들이 이어가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연설가였으며 민주주의 인권 지도자였다. 방대한 분량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인권 통일 분야에 걸쳐 자신의 철학을 담은 수많은 이론서를 집필한 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리고 그 이름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DJ만큼 전 세계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이도 없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유수의 지도자와 언론으로부터 ‘한국의 넬슨 만델라’ ‘행동하는 양심’ ‘민주주의 지성’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가 국민의 가슴에 이름을 남기고 세계의 존경을 받은 데는 민주화를 향한 지대한 헌신이 있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한국의 넬슨 만델라’

DJ가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그의 정치인생 대부분은 민주화의 위한 투쟁으로 점철됐다. 연금, 납치 등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외로운 망명길에 오르면서도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안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밖에서는 DJ의 투쟁은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 있게 했다. 이들은 1987년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대통령직선제라는 민주화 체제의 출범으로 이끌어냈다.

특히 DJ는 네 번째 대권도전에서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이는 절차적 민주화의 일대 분수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DJ와 오랜 친분을 나눈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 대사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횃불과 같은 존재였다”고 전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우리가 누려온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을 그에게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DJ는 재임시절 국제회의에서 언제나 첫 번째 발언권을 부여받을 정도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이는 DJ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내는데도 큰 힘을 발휘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과 미셀 캉드시 IMF 총재는 “김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DJ는 6·25 이래 최대 위기였던 환란이었던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기업 인수 문제에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이다. 또한 그는 재임 중 많은 부실기업들을 퇴출시켰고 재무개선약정, 워크아웃 등을 통한 기업 회생을 추진,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데도 일조했다.

미국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자신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김대중은 심각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를 아시아의 어떤 지도자보다 잘 극복하고 한국 경제 체제를 건강하게 바꾼 지도자”라며 “여러 면에서 한국민들은 뛰어난 지도자로 인해 위기를 극복한 행복한 국민들”이라고 적었다.

‘햇볕정책’을 빼고는 DJ를 설명할 수 없다. 남북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그가 병상에 누워서도 잊지 못했던 일이다.

DJ는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 유화정책을 폈다. 그리고 이는 한반도의 냉전적 남북 대결구도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 국민들의 대북 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2000년 6월15일 DJ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관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광복 후 최초로 열린 정상회담에서 DJ와 김 위원장은 6·15 공동선언문을 채택, 남북화해협력에 새 지평을 열었다. DJ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 또한 누렸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재임시절 DJ에게 조언을 구해 대북정책을 수립할 정도를 그를 신뢰했다.

트레이드마크 ‘햇볕정책’
공과 모두 담은 DJ의 꿈

그러나 이러한 ‘공’ 뒤에는 ‘과’가 따랐다. 햇볕정책에 의한 대북지원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남북정상회담도 생채기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DJ는 병상에 누워서도 남북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잊지 않았다. DJ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병상에서도 남북관계 진전을 바랐다”며 “위독한 중에도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소식을 듣고 기사를 계속 읽어달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마지막 서거하실 때까지 내가 가서 현정은 현대회장의 방북과 5가지 합의사항, 그리고 ‘정부에서 방향전환이 있을 것 같다’는 보고를 드렸다. 마지막 임종하시는 날도 ‘대통령님께서 생전에 바라셨던 대로 남북의 교류협력을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 평화, 세계평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북측도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의 주역인 DJ의 서거에 조전을 보내 애도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화환을 가지고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포함된 6명의 특사 조문단을 파견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부장이 포함되는 등 실세들의 방문을 통해 남북 당국간 고위접촉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냉랭했던 이전과는 달리 최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 위원장과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등 5개항 합의를 이뤄낸 상태라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과제로 남은 지역주의
서거 계기로 해소될까

DJ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은 지역감정 해소라는 과업을 떠안게 됐다. DJ는 평소 지역주의에 대해 1972년 공화당이 만든 신화라고 주장했지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YS와의 후보단일화 실패는 영호남간 지역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했기 때문이다.

DJ도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 뛰었다. 1997년 대선에서는 “나도 김해 김씨로 경상도 사람이고, 나의 두 며느리도 부산에서 태어났다”며 영남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또한 취임하면서 “앞으로 호남이니 영남이니 따지지 않고, 지역적으로 차별받는 인사가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1998년에는 “지역주의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대통령을 못하면 못했지 절대로 동서분단을 방치할 수 없다”고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호남의 맹주’라는 절대적 지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데다 집권 기간 내내 호남편애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수혜자’이기도 했음을 계속해서 지적받았다.

DJ가 서거 전 반세기 가까이 애증으로 얽혀있던 YS와 극적으로 화해를 한 것을 계기로 정치권 내에서 ‘동서화합론’이 부상하고 있다. 특히 DJ의 국장을 통해 이념과 당파, 지역갈등과 반목을 뛰어넘는 국민 통합이 이뤄질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여야도 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각각 당 차원의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DJ와 YS가 주도해 만든 민추협도 동서 화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민추협 회장인 김무성 의원은 “DJ 서거를 계기로 YS와 DJ 사이의 갈등의 골이 해소되면서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지역감정의 벽이 허물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영호남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논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 노정객도 “이제 이념을 논할 단계는 지났다. 열린 보수와 건전한 진보는 맥을 함께한다”며 “정책 판단의 기준을 이념이 아닌 국가와 국민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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