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배달원의 억울한 옥살이 사연

2013.09.02 14:56:29 호수 0호

범인 잡았나 만들었나…진실은? 

[일요시사=사회팀] 소설가 공지영이 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정윤수는 여자 3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수술비 300만원을 구하려고 한 술집 여인의 집에 찾아갔을 뿐이다. 함께 갔던 선배가 술집 여인과 그의 딸, 파출부를 죽였고 윤수는 돈만 훔쳐 달아났다. 그러나 윤수는 선배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수가 된다. 과연 소설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한 남성의 사연을 들어보자.





9년 전 고성옥(당시 48·남)씨는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는 배달원으로, 낮에는 집수리 및 도배 일을 하던 평범한 40대 가장이었다. 그러나 2004년 9월 8일 새벽 3시30분께 제주시 연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벌어진 특수 강도 및 강간 미수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잃어버린 7년

고씨는 이날 피해자 장모(당시 41·여)씨가 살고 있는 집의 작은방 창문을 통해 침입해 장씨를 흉기로 위협, 14K 반지 1개와 목걸이 1개 등 35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뒤 폭행하고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경찰은 노란색 티셔츠와 면장갑, 소형 커터칼을 물증으로 내세우며 고씨를 범인으로 몰아세웠다. 고씨는 시종일관 혐의 내용을 전면 부인했지만, 결국 경찰은 고씨를 입건했고 이는 법원에서도 그대로 인정됐다.

고씨는 제주지방법원에서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2005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씨의 옥살이는 7년 동안 이어졌다.


2011년 9월. 고씨는 만기 출소했다. 고씨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사회적 약자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낀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강도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달아나는 범인을 ?다 놓친 뒤 모든 죄를 뒤집어 쓴 그날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씨는 “차라리 범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며 “하지만 범인이 아니기에 분하고 억울해서 죽지도 못하고 눈물로만 살아왔다”고 말했다. 다 잊고 용서해 보려 하기도 했지만 잃어버린 명예만큼은 되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고씨는 그해 11월 제주경실련공익지원센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과 함께 7년 전의 진실을 캐나갔다. 제주경실련공익지원센터 등은 3년에 걸쳐 면밀하게 관련 증거를 검토하고 관련 증인들을 만나 면담한 결과 고씨의 주장이 진실임을 확인했고, ‘고성옥씨 7년 억울한 옥살이 진실찾기 모임’을 결성했다.

진실찾기 모임은 그 첫 번째 활동으로 지난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고씨의 무죄를 주장했다. 고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무슨 말을 해야 제 심정과 무고함을 알릴 수 있을지 막막하다”며 “당시 사건 시간으로 볼 때 사건을 일으킬 수도 없는데 경찰관은 이를 묵살한 채 증거를 조작했다”고 말했다.

고씨는 “증거와 관련해 피의자 사인과 도장이 있어야 함에도 경찰이 알아서 처리했고 조서에서 발견된 지문 차이가 조작의 증거”라며 “이 사건은 범죄증거로 범인을 잡은 것이 아니라 국가가 범인을 만들고 해결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누명의 덫’걸려 7년간 강도·강간범으로
진실찾기 모임 10가지 이유 들어 무죄 주장

진실찾기 모임은 ▲객관적 증거 부족 ▲경찰의 객관적 증거와 사실 묵살 ▲신뢰성 없는 피해자 진술 ▲경찰의 타인 족적 인멸 ▲경찰의 증거조작 및 법정 허위증언 등을 제시하며 고 씨의 무죄를 주장했다.

양시경 제주경실련 대표는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강도가 1시간이나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고씨는 신문배달을 하고 있었고 이는 신문부수를 확인하면 입증된다”며 “고씨를 고용했던 조선일보 신제주지국장이 당시 증인으로 채택돼 고씨가 하루에 배달하는 신문부수와 시간을 진술, 알리바이를 증언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 신문 배달을 시작한 시간(새벽2시 30분)과 이미 배달한 신문 부수(180부)를 계산하면 범행이 일어난 시각에 사건현장에서 약 1시간동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이 입증된다는 주장이다.

진실찾기 모임은 반면 경찰이 증거로 삼은 진술에는 신뢰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피해자는 경찰 진술조서에서 목격자 송씨가 사건현장인 집에서 고씨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지만, 송씨는 실제 경찰 진술에서 사건 현장과는 70m 떨어진 사거리에서 고씨를 처음 목격했다고 진술했다”고 강조했다.

범인의 인상착의로 지목된 ‘노란 티셔츠’에 대해서도 경찰의 주장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진실찾기 모임은 “당시 고씨가 하얀색 런닝 셔츠를 입고 있었음에도 경찰은 고씨의 신문 배달 오토바이 바구니에서 발견된 노란 티셔츠를 증거로 삼았지만, 이는 주변에 거주하는 여성이 법원에 출석해 문제의 노란 티셔츠가 자신의 것이며 사건 발생 전에 잃어버렸다고 진술했다”고 반문했다.


이어 “당시 낮에는 자활후견센터의 주선으로 도배와 집수리를 하던 고씨가 안주머니에 늘 갖고 다니던 소형 커터칼을 범행용 흉기로 둔갑시켰다”며 “범행을 준비하는 강도가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소형 커터칼을 가지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도 지적했다.

이들은 또 경찰의 증거 인멸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피해자 옆집에 거주하며 범행 장소를 목격한 증인이 “사건현장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발자국을 보았다”고 진술, 경찰이 고씨의 운동화와 대조한 결과 일치하지 않아 증거를 인멸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이웃주민이 청소해서 족적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등 거짓말로 증언했다는 게 진실찾기 모임의 설명이다. 

면장갑에 대한 증거인멸 의혹도 있다. 이들은 “당시 범인이 도망치면서 추격하는 고씨와 거리가 좁혀지자 범인이 무엇을 던지기에 고씨는 훔친 물건을 되돌려주는 줄 알고 주웠더니 면장갑이었다”며 “고씨는 도배를 하며 사용하기 위해 주머니에 넣었고, 경찰은 면장갑에서 묻어나온 머리카락을 고씨의 모발로 의심해 국과수에 감정의뢰했지만 그 결과 고씨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 3자의 모발이 나왔다”고 말했다.

진실찾기 모임에 따르면, 이를 알게 된 경찰이 무리한 수사의 잘못을 덮으려고 모근이 있음에도 없어서 시행하지 않았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사실과 다른 허위 감정서를 작성했다.

양 대표는 “고씨가 과거에 살인미수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짜맞추기식 수사는 있어서는 안된다”며 “고씨는 국가공권력과 사법부의 잘못된 오판이 낳은 무고한 희생양”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진실규명에 어려운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고씨의 억울한 7년 옥살이 누명을 벗기는데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고씨는 “고향도 못 가고, 친구도 못 만나고, 자식과 손주를 생각하면 너무 괴롭다”며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이제라도 명예를 되찾고 또 다른 사법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사과정 위법?

임문철 신부는 “2011년 출소 뒤 민변 등 법률단체를 찾아가는 등 노력을 했지만 재심사유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런데 한 법률전문가는 당시 변호사가 조금만 더 적극적인 노력을 했으면 모르겠다는 발언을 했다”며 “이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법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적인 문제”라고 밝혔다.

진실찾기 모임은 경찰이 승진에 대한 욕구 때문에 증거를 조작하고 은폐수사를 했고, 이것이 법정에서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이날 기자회견 직후 당시 지구대 경찰관 2명과 제주경찰서 감식담당관 등 3명을 고발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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