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에서 피랍된 엄영선씨의 사망 사실이 확인되면서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무고한 한국인들의 피랍과 사망 등의 피해가 끊이지 않자 해외여행객들과 교민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
언제 어디서든 한국인을 겨냥한 제2, 제3의 테러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여행사, 여행객 모두 해외여행 위험성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테러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현주소를 쫓았다.
여행사 등에 대해 법적 구속력 없어 문제 ‘되풀이’
허술한 정부 대응이 테러 노출, 국민홍보 부족 지적
한국인 엄영선씨의 피랍과 살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외여행객들과 교민들에게 적신호가 켜졌다. 이들은 여행국가의 안전성 여부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해외여행에서의 한국인 겨냥 테러가 또다시 극성을 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국민들 사이에선 한국인들에게도 테러 위협은 이제 먼 나라 얘기가 아니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인식 이면에는 이슬람권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 테러가 몇 년간 급증하고 있다는 게 한몫 거들고 있다. 실제 지난 2003년 11월30일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오무전기 직원들이 이라크 티크리트 고속도로에서 차량 이동 중 피격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만수, 곽경해씨는 사망했다. 또 이상원, 임재석씨는 부상을 당했다.
한국인 대상 테러 급증
테러 사건은 이듬해인 2004년에도 발생했다. 한국인들이 이라크에서 연이어 피랍된 것이다. 5월31일에는 특히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피랍됐다가 다음달 22일 시신으로 발견돼 충격을 줬다. 당시 김씨는 물건배달을 위해 바그다드에서 팔루자로 트럭을 이용해 이동하다 무장단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에 피랍됐다.
피랍사건은 해를 넘겨도 계속 일어났다. 2006년 3월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취재 중이던 방송사 특파원이 무장단체인 PFLF(팔레스타인 해방전선)로 추정되는 무장 세력에 납치됐다가 하루 만에 석방됐다. 또 4월4일에는 동원수산 수속 원양어선 제628호 동원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 현지 무장단체에 선원 25명이 피랍됐다가 117일 만에 풀려나는 일도 있었다.
2007년에는 피랍사건이 7건 발생했다. 2월27일, 다산ㆍ동의부대의 윤장호 병장이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미군 기지에서 탈레반의 폭탄테러로 희생됐다. 7월19일에는 분당 샘물교회 자원봉사자 23명이 탈레반에 피랍됐다. 온 국민이 공포의 분위기에서 떨고 있는 가운데 이들 중 25일에는 배형규 목사가, 31일에는 심성민씨가 살해됐다. 반면 다음달 13일 김경자씨와 김지나씨가 석방됐고 29일에는 인질 12명이 세 차례에 걸쳐 풀려놨으며 그 다음 날 나머지 7명도 석방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10월26일에는 과테말라 거주 교민이 무장괴한에 납치됐다가 석방됐다. 28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 근해에서 한국인 선원 2명이 탑승한 일본 선박 골든노리호가 해적단체에 피랍됐다. 한 명은 당일 탈출했으나 전우성씨는 45일 만인 12월12일에서야 석방되기도 했다.
2008년 역시 피랍사건은 이어졌다. 4월28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을 지나던 한국 선적 화물선 알렉산더칼호가 해적단체로부터 피습 당했다.
11월15일에는 한국인 5명이 탄 일본 국적 화물선이 해적에 피랍돼 3개월여 만에 풀려났다. 한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이처럼 빈번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테러의 주체세력인 소말리아 해적, 이슬람 무장 세력 등에 대한 대응이 무방비에 가깝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오면서 그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그러면 한국은 ‘묻지마 테러’에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할까. 현재까지의 정부 대책 마련을 보면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일이 터져야 수습에 나서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정부의 뒷북 정책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여행사들에 대한 규제 여부다.
사실 여행사들이 상품을 판매할 때 중동 지역의 위험성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형사 처벌하거나 과태료를 물리는 등 처벌을 강화하는 법적 근거 마련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여행사 등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데 있다. 때문에 외통부가 아무리 대국민 홍보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 사이에선 여행사들이 중동 지역 관련 위험성을 고지하지 않을 경우 영업정지, 영업취소 등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오지 여행, 이색 체험, 해외 선교, 성지 순례 등도 좋지만 신변 안전이 우선”이라면서 “상품 판매에 급급한 여행사 광고도 그대로 믿을 게 못되는 만큼 여행객 스스로 판단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지역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미약하다. 평상시에 중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족장, 학자 등과 교류를 잘해 두고 이슬람인들을 대상으로 한 관광프로그램과 강연회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안전에 대한 최종 책임을 개별 해외여행객이 져야 한다는 현실에 있다. ‘내 안전은 내가 지킨다’는 인식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현주소다. 연간 해외여행객 1000만명 시대에 완벽한 정부의 행정지도를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해외여행에 나서는 국민들을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한국일반여행업협회에 등록된 여행사 667곳 중 상위 100곳의 중동지역 항공권 판매집계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중중동지역을 찾는 여행객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만 봐도 모두 8만2981명이 중동을 다녀왔다. 2003년 1만8284명, 2004년 1만9316명에 비하면 4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정부의 단호한 조치 필요
해외여행을 주로 한다는 김한일(44)씨는 “관광객들의 안전에는 정부 당국, 여행업계, 관광객이 따로 있을 수 없다”면서 “정부 당국은 테러행위에 더욱 단호한 조치를 취해 우리 국민을 타깃으로 삼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국가 대테러 활동기본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테러에 대응할 수 있는 법적 체제가 안 돼 있고 테러 관련 인력이나 전문가 등을 양성할 수 있는 체제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아울러 대테러 정보 제공을 확대하고 여행 제한 지역에 대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