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아트인> 서양화가 박병호

2013.06.10 09:32:22 호수 0호

"예술도 자본주의?…돈보다 자유"

[일요시사=사회팀]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보이는 동안을 가진 노(老)화백. 서양화가 박병호 선생은 때론 천진한 아이처럼 때론 속 깊은 맏형처럼 인터뷰에 응했다. 일생을 자유롭게 살았을 것 같은 그지만 이면에는 남모를 고충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허물조차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 당당한 사내였다.






비좁은 작업실, 수북이 쌓인 그림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화가를 시작하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으세요?"
서양화가 박병호 선생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후회한 적 없어요.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면서 자유롭게 살면 된 거지."

열악한 현실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그는 50여년을 붓과 함께 살았다. 부부도 몇 십 년을 함께 살면 질린다는데 그림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박 선생은 아픈 아내를 간병하는 중에도 틈틈이 화실에 들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이 자신의 직업이자 삶이기 때문. 하지만 그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대가로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있다.

"한평생 그림만 그렸는데 지금도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되는 작가가 너무 많습니다.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심지어 미협(한국미술협회) 회원 중에서도 생활이 어려운 작가가 많습니다."

"이건 정말 비참한 거죠. 저는 작가들에 대한 정말 기본적인 정부의 생활 보조 정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금전적으로 생계비를 보장해 주는 방안이 있고, 작품을 살 수 있는 컬렉터와 작가의 교류를 활발히 해주는 방안도 있고. 찾아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러나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게 안타깝습니다."


자본주의 논리가 깊숙이 침투한 우리 예술계. 박 선생은 "돈이 있으면 미술계에서 행세할 수 있다"며 몇몇 아마추어 화가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친족이나 남편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수준 이하의 전시회를 여는 작가가 있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니까 어찌됐든 돈만 많으면 되는 거예요. 개인전은 아무리 작게 해도 한 번에 2000만∼3000만원은 들어갑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은 평생에 한 번 할까 말까 하고요. 그런데 돈이 있으면 어떤 사모님들은 계절마다 전시회를 합니다. 이건 이중섭도 못했던 일이죠. 또 전시회에 걸린 그림들은 그림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맥 때문에 서로 사고 팔립니다. 그림을 우습게 알면 안 되죠."

그 흔한 종이조차 구할 돈이 없었던 이중섭은 최후의 도화지로 담배 종이를 택했다. 그리고 이중섭이 세상을 떠난 지 반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가난한 화가들의 생활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미협에서 알아주는 마당발로 통하는 박 선생도 재물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감은 가격이 오르는데 그림 값은 안 올라요. 보통 호당 20만∼50만원이 많고, 많게는 100만원, 유명한 화가들은 아시다시피 이보다 더 비싸죠.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한 작품에 수백만원씩이나 하는 그림을 어떻게 사요? 못 사지. 물론 아낌없이 그림을 수집하는 분도 계세요."

"하지만 그런 분들이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법인이나 공공기관에서 사주면 도움이 많이 되는데 이걸 컨트롤하는 게 미협입니다. 미협 본부로 협조 공문이 오면 화가를 추천해서 그림을 소개하는 식이죠. 그러니까 미협의 힘이 얼마나 셉니까? 하지만 그동안 미협은 본래의 기능을 못했던 게 사실이고요."

붓과 함께 50년…남모를 고충 털어놔
대부분 생활고 "정부 생활보조 절실"

금훈의 작업실 한편에는 그가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놓여있다. 기자에게 박 선생은 "이게 다 팔리면 먹고 사는 데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며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이내 "이러다 죽으면 마는 것"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형님도 화가입니다. 형님은 제 그림의 스승이기도 하죠. 어쩌다보니 형님도 저도 그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림이 좋아서 그리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죠. 풍족하지는 않지만 몇 년 전까지 그림으로만 먹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안 돼요. 솔직히 말해 용돈벌기도 힘듭니다. 지방에 있는 화랑은 거의 다 문을 닫았고, 몇몇 고급 갤러리 외에는 다들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래도 전 그림을 그리는 게 좋습니다. 자유롭잖아요.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손만 멀쩡하면 죽기 전까지 그릴 수 있고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그림은 자유


박 선생은 경상도 출신답게 시원시원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게' 박 선생의 신념. 그런 그도 살면서 여러 말 못할 일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붙잡아 준 건 그림이었다는 설명이다.

"인터뷰하면서 쓴소리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우리 미술계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젊은 작가들이 이젠 외국에도 나가고, 그곳에서 전시도 하고 그러면서 외연이 조금씩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무엇보다 모든 예술의 기본은 바로 '미술'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내가 화가였다는 자부심은 변치 않을 거예요."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박병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 수료
▲신미술 심사위원 겸 초대작가
▲서울미술상 수상 외 다수
▲터키 대사관 초청 한·터키전 참여
▲한국미술협회 동작지구 서양화분과 위원장
▲現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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