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무형문화재 박상진 도공

2013.03.08 11:01:16 호수 0호

"일본인이 더 한국도자기에 관심 많아요"

[일요시사=사회팀] 전통 도자기를 만든다고 하면 왠지 고집스런 장인의 느낌이 든다. 검게 그을린 얼굴, 땀에 젖은 한복.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전통 도예를 오해하고 있는 사이, 선조가 남긴 ‘우리의 것’은 모두 바다 건너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형문화재 박상진 도공은 “어쩔 땐 일본인 수집가에게 더 환대를 받았었다”며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완만한 곡선의 도자기는 붉은 빛의 차(茶)가 담기자 그 맵시를 더했다. 박상진 도공과 마주 앉은 평상에는 형형색색의 다과가 올려졌다. 다도에 정통한 박 도공은 "색(色)과 향(香)과 미(美)가 한데 어우러져야 다도가 완성된다"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박 도공이 직접 빚은 찻잔을 보고 있자니 그 안에 술(酒)이 담긴다면 또 어떤 모습으로 멋을 더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시대흐름 따라야"

"너무 딱 떨어지는 건 재미없잖아. 요즘 나오는 찻잔들은 완벽한 좌우대칭이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걸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재미가 없거든. 멋이 없어. 그리고 그런 건 공장에서 더 잘 만들고. 우리랑은 길이 전혀 다른 거죠."

박 도공은 40여년을 도자기 만드는 일에 매진해왔다. 1971년 고려도요로 입문해 2011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기까지 그는 오직 '분청사기' 한 길만을 걸었다. 박 도공은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의 찌든 때에 시름하는 삶보다 흙 때 묽은 자신의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

"틀에 매이지이지 않고 나를 표현하기 가장 적합한 게 분청사기였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고요. 사실 살다보니까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성격이 그렇게 쉽게 바뀌거나 그렇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고집불통이라고도 해요."

사실 박 도공을 직접 만나면 고집 센 외골수가 아닌 자유로운 사교가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의 활달한 겉모습 이면에는 고독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도예가들의 삶 자체가 고독한 삶의 연속"이라고 박 도공은 말했다. 그는 지난 8년 동안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도자기 집성촌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했던 그였기에 실패에 대한 상처도 컸다. 몇 번의 좌절 끝에 그는 다시 도예가 본연의 삶으로 돌아왔다.


"시작은 경기도 이천이었습니다. 도자의 고향이죠. 어릴 때는 산을 참 좋아했어요. 거기서 만져지는 흙도 좋았고요. 특히 흙을 가지고 무언가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도자라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나중에 어느 정도 흙을 만지게 돼서야 어떤 작업을 할 것인지 고민이 들더군요. 갈등도 많았죠. 그러나 저는 목표를 잡으면 원래 끝까지 하는 놈이라…."

그는 도원요에서 분청사기를 연마한 끝에 1987년 자신의 호를 딴 개천요를 설립했다. 자유로우면서도 틀을 벗어나지 않는 절도가 개천요만의 특징이다. 실제로 그는 굉장히 현대적인 감각의 작업을 한다. 몇몇 작품에서는 서양화 기법도 발견된다. 그러면서도 뿌리인 분청사기 특유의 멋은 놓치지 않는다.

"전통은 답습하는 게 아니라 계승하는 겁니다. 우린 기능공이 아니라 예술가거든. 지금 미술 하는 사람들이 다 옛날 것만 그리나? 그건 아니잖아요. 우리 도예공도 마찬가지고."

도자기 외길 인생…경기도 무형문화재 등재
틀 매이지 않은 분청사기에 40년 공들여

박 도공은 전통 도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내 작품에 더 관심을 갖는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지나친 비관도, 지나친 낙관도 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질곡의 길이라고 봐요. 누군가는 가야되는데…. 일단 도예가로 산다는 게 쉽지는 않아요. 작업도 혼자 하는 경우가 많고, 전통 도예가들이 서구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경우도 많고. 사실 전통은 계승하고 전수해야하는 건데…. 그러려면 도자기가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쓰임을 가져야 하나 이런 것도 우리 도예가들이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대대로 전수된 우리 선조의 전통을 온 몸으로 이어받은 박 도공. 그는 '멘토'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도예에 있어서만큼은 "많은 사람의 멘토가 되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가 최근 '광주 숯가마골'에 '작업장 전수관'을 신축한 것도 같은 이유다.

"광주는 조선도자기의 산실입니다. 그리고 '광주 숯가마골'은 선조 사기장들의 숨소리가 남아 있는 곳이고요. 제 낢은 삶을 전통도자기의 맥을 잇는 사람과 선조마저 놀랄만한 작품을 만드는 데 바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도자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달라 쉽지 않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더 어린 나이에 도자를 공부시켰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요즘은 외손자를 볼 때마다 흙장난을 치도록 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 그래도 마음이 좀 놓입니다."

도예가들의 멘토

유년시절. 흙과 함께 놀며, 흙으로 범벅된 자신의 모습에서 도예가로서의 삶을 발견한 박 도공. 그는 전통을 이어갈 후대가 자신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 도자기와 도예가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도 인터뷰 말미에 전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박 도공과 함께 나눈 차의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박상진 도공은?
▲1957년 경기 이천 출생
▲1971년 지순택 선생 고려도요 입문
▲1974년 박부원 선생 도원요 연마
▲1987년 개천요(開川窯) 설립
▲2011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1호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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