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람 사는 세상’에 가보니…

2009.04.14 11:05:11 호수 0호

‘사람 사는 세상’에 가보았다. 그곳이 어디인지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만든 인터넷 공식 홈페이지 명칭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곳에서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따르고 지지했던 사람들과 소통하며 나름대로 ‘소탈한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안희정, 문재인 등 핵심 측근들이 그곳에서도 주류를 형성하며 소위 ‘노빠’라 칭하는 사람들과 교감을 이루는 듯 보였다. 서로 격려하고 칭송하고 사과하고 해명하고…

그런 사람 사는 세상에 청천벽력 같은 ‘사과문’ 하나가 실리면서 대한민국을 또 한 번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노 전 대통령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의 돈을 받았단다. 물론 빌렸다고 했다. 그것도 당신이 아닌 ‘저의 집(권양숙 여사)’이 미처 갚지 못한 빚이 남아있어 측근인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박 회장에게 빌려서 사용했다고 했다.

빌린 것과 그냥 받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차용증을 쓰면 빌린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뇌물이란 말인가. 빌렸다는 말은 한낱 대가성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핑계로 들린다.

또 대가성이 있든 없든 진짜 빌렸으면 일찍이 갚았어야 했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오히려 퇴임 이전보다 재산은 더 늘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기에 과연 애초부터 갚을 마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만약 들통나지 않았으면 빌린 것조차도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돈은 아니었을까.

더욱이 돈을 빌려준 당사자인 박 회장은 그 돈을 과연 빌려준다고 생각하고 건넸을지가 의문이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게이트를 통해 드러난 박 회장의 ‘통큰 행각’에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더불어 노 전 대통령의 가장 ‘샘 깊은 후원자’ 역할을 해온 박 회장이 아니었던가. 그런 박 회장이 총무비서관을 통해 영부인에게 준 돈을 과연 빌려준다고 생각하고 줬을까?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손바닥으로 해 가리듯 하려는 노 전 대통령의 사과는 또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것도 정 전 비서관이 검찰에 체포되니까 그를 옹호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노 전 대통령의 사과는 어딘지 모르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수사 과정에서 당신의 허물을 뒤집어쓰게 될 측근이 가엾었거나, 아니면 그의 입을 통해 모종의 비리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미리 선수를 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정치인 노무현’의 트레이드마크가 무엇이었던가? 청렴성과 진정성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솔직함이 조금은 저돌적으로 비쳐져 권위주의에 찌든 보수들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고 대통령을 만들어준 지렛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그것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극히 일부의 사람 사는 세상 회원들에겐 그것마저 솔직하게 비쳐졌는지 사과문 아래 달린 셀 수 없는 댓글들은 격려와 칭송 일색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수억 때문에 억장이 무너졌고, 씻을 수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 비록 다른 당에 정권을 넘겨주긴 했으되 많은 국민들은 그의 ‘아름다운 퇴장’에 박수를 보냈고, 그만은 전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시작으로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우리 역사 속 최고권력자들의 비극적인 말로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국민들이었기에 노 전 대통령만은 ‘봉하마을’에서 편하게 여생을 보내길 바랐다.

참으로 간절한 기대였고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그런 순수한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고 이제 또 다시 전직 대통령의 검찰조사와 그 후에 따를 사법처리까지를 우려하는 국민들의 심경은 착잡하다 못해 비통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 같은 참담한 비극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국민들은 이번 게이트에서 노 전 대통령 얘기가 회자되었을 때, 단지 친인척과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로만 그칠 것으로 믿고 설마설마 했었다. ‘권력을 빙자해 청탁과 로비를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하도록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설마’가 사람을 잡은 셈이다.


취임 초 평검사들과의 TV 대화를 자청해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던 노 전 대통령. 그는 이제 진짜 계급장을 떼고 검사들과 일전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의 말대로 모든 사실은 검찰 조사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며, 추호라도 불법과 비리가 있었다면 법대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고. 이래저래 4월은 최고권력을 누렸던 노 전 대통령에게도, 그를 바라보는 국민들에게도 잔인한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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