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국가는 왜 ‘선지급’해야 하는가

2026.04.06 07:44:40 호수 1578호

종이 위에서 끝내지 않는 국가 책임

국가는 언제 신뢰를 얻는가. 판결을 내릴 때가 아니라 그 판결이 현실에서 작동할 때다. 법원은 매일 수많은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른다. 그러나 그 판단이 실제 집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순간, 정의는 선언에 머문다. 지금 한국 사회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춰 있다.

판결은 있지만 결과가 없는 구조, 이것이 우리가 외면해 온 사법의 빈틈이다.

우리는 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집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판결이 내려지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승소 판결을 받아도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법원이 인정한 권리가 현실에서는 무력화되는 것이다. 정의는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설계의 문제다.

국가는 이미 선지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체당금 제도다. 회사가 임금을 지급하지 못할 경우, 국가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근로자에게 먼저 돈을 지급한다. 약 2100만원 수준의 한도 내에서 생계를 보호한다. 이후 국가는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해 회수한다. 피해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국가가 먼저 움직인다.

이 구조의 핵심은 책임의 방향이다. 개인이 모든 위험을 감당하지 않는다. 국가가 최소한의 정의를 선제적으로 보장한다. 이것은 복지가 아니라 질서다.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래서 체당금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제도적 설계다.

교통사고 보장사업의 구조= 교통사고 피해자 보호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가해자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거나 지급 능력이 없는 경우, 정부가 먼저 피해자를 구제한다. 이후 국가는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한다. 이 구조는 피해자의 삶이 무너지기 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제도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제도의 핵심은 시간이다. 피해 회복은 빠를수록 효과가 크며, 늦어질수록 피해는 확대된다. 그래서 국가는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개입한다. 이것이 선지급의 본질이다. 속도가 곧 정의다. 시간 지연이 곧 추가 피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국가가 제도로 인정한 것이다.

예금자 보호 제도의 메시지= 금융 시스템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은행이 파산해도 일정 금액까지는 국가가 먼저 지급한다. 예금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이후 정리 절차를 통해 자산을 회수한다. 신뢰는 즉시 보장되고, 시스템은 유지된다. 이 선지급 장치는 금융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는 마지막 방어선이기도 하다.

이 구조가 없다면 금융은 무너진다. 사람들이 돈을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선지급은 신뢰의 장치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다.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신뢰가 무너지면 금융은 물론 경제 전체가 연쇄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는 피해자가 기다리는 구조는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임금, 교통, 금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선지급을 선택했다. 그런데 유독 민사 영역만 이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은 예외가 아니라 공백이다. 그리고 그 공백은 지금까지 제도가 외면해온 사각지대다.

민사소송의 구조적 결함= 민사소송의 가장 큰 문제는 집행이다. 승소 판결을 받아도 피고에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법적으로는 이겼지만, 현실에서는 진 것이다. 이 모순은 너무 오래 방치됐다. 제도가 존재하지만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구조, 그것이 민사소송의 본질적 한계다.

원고는 시간과 비용을 모두 부담한다. 변호사 비용, 소송 비용, 그리고 몇 년의 시간까지 투자한다. 그러나 결과는 불확실하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개인의 노력과 권리 행사가 제도적 한계 앞에서 좌절되는 구조,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소송은 권리 구제가 아니라 또 다른 위험이 되어버린다.

판결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시스템은 불완전하다. 법원이 옳다고 판단했음에도, 그 판단이 현실에서 무력화된다면 사법은 절반만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판결이 아니라 집행의 설계다. 판결의 권위를 현실의 결과로 연결하는 구조, 그것이 사법 완성의 조건이다. 정의는 선언이 아니라 실행에서 완성된다.

필자의 제안, 국가 선지급=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구조를 제안한다.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원고에게 국가가 먼저 손해배상금의 전부나 일부를 선지급하고, 이후 법원이 피고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정의를 앞당기는 구조다. 판결의 결과를 시간의 문제로 미루지 않고 즉시 현실로 연결하는 설계다.

이 제도의 핵심은 단순하다. 판결이 확정되는 순간, 최소한의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다. 원고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판결은 곧 현실이 된다. 판결과 집행 사이의 공백을 제거하는 것이 이 구조의 본질이다. 즉, 정의의 시간을 앞당길 뿐만 아니라 정의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역할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다른 영역에서 하고 있는 일을 사법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적용의 문제다. 우리는 이미 선지급 구조를 알고 있고 경험해 왔다. 이제 그것을 사법에 적용할 것인지의 선택만 남아 있다.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다.

최소 50% 선지급 원칙= 구체적으로는 최소 50% 이상을 선지급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전액이 아니라 일정 비율을 먼저 지급하는 것이다. 이는 재정 부담을 통제하면서도 정의를 실현하는 균형점이다. 과도한 재정 리스크를 피하면서도 실질적 피해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설계다. 즉, 국가와 개인 사이의 책임을 균형 있게 나누는 구조다.

이 비율은 정책적으로 조정 가능하다. 사건의 성격이나 금액에 따라 차등 적용할 수도 있다. 최소한의 회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판결의 의미 자체가 흔들린다. 따라서 이 비율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법 신뢰를 지탱하는 기준이다. 동시에 재정 건전성과 정의 실현을 동시에 고려하는 정책적 장치이기도 하다.

절반의 선지급은 정의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나머지는 집행 절차를 통해 보완하면 된다. 정의는 한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구조의 본질은 완결이 아니라 작동이다. 판결이 현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정의의 출발점이다.

민사소송기금의 설계

이 제도를 위해서는 별도의 기금이 필요하다. 가칭 ‘민사소송기금’이다. 정부 출연과 함께 소송 당사자가 일정 비율을 부담하는 구조로 설계할 수 있다. 이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위험을 분담하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국가가 기반을 만들고 점진적으로 참여를 확대하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소송은 개인의 권리행사지만 동시에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일부를 공동 기금으로 환원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는 위험을 분산하는 장치다. 한 개인의 불확실성을 사회 전체가 나누어 부담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집행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위험을 제도적 안정으로 전환하는 설계다.

기금은 단순한 재원이 아니다. 사법 시스템을 완성하는 기반이다. 판결을 현실로 연결하는 다리다. 이 다리가 없으면 사법은 반쪽이다. 판결과 집행 사이의 단절을 메우는 구조적 장치가 바로 이 기금이다. 기금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를 작동시키는 설계의 문제다.

단계적 도입의 현실성= 이 제도는 한번에 도입하기 어렵다. 금액이 크고 영향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계적 도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5000만원 이하 사건부터 시작할 수 있다. 초기에는 범위를 제한해 재정 부담과 제도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축적된 경험이 제도의 안정성을 높이는 기반이 된다.

소액 사건일수록 피해 회복의 필요성이 크며, 집행 실패 가능성도 높다. 이 영역에서 먼저 작동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다. 상대적으로 구조가 단순해 제도 효과를 빠르게 검증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작은 영역에서 성공한 모델은 더 큰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제도는 완성된 상태로 시작되지 않는다. 작동하면서 완성된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다. 멈춰 있는 것보다 불완전하게라도 움직이는 것이 낫다. 시행착오는 비용이 아니라 학습이다. 그 과정을 통해 제도는 현실에 맞게 다듬어진다. 변화는 설계가 아니라 실행에서 완성된다.

법적 쟁점과 통제 장치= 물론 법적 논란은 불가피하다. 국가가 사적 분쟁에 개입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도덕적 해이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소송 남발이나 허위 청구 가능성을 우려할 것이다. 이 같은 비판은 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반드시 검토돼야 할 요소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설계로 해결 가능하다. 지급 비율 제한, 악의적 소송에 대한 제재, 엄격한 심사 기준 등 다양한 통제 장치를 도입할 수 있다. 기술과 데이터 기반 심사 시스템을 결합하면 오남용을 더욱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 문제는 존재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정교하게 통제할 수 있느냐다.

문제나 위험은 관리하면 되지만, 의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계의 결단이다. 완벽을 기다리는 순간 개혁은 시작되지 않는다. 불완전하더라도 방향이 맞다면 실행이 답이다. 변화는 결심에서 시작되고, 제도는 그 결심을 구조로 만드는 과정이다.

보험 시장과의 결합= 이 구조는 민사소송과 연계된 보험 상품이 등장할 수 있다. 변호사 비용 보장뿐 아니라 판결 결과에 따른 손실 보전까지 확장될 수 있다. 소송 전·중·후 전 과정에 걸친 리스크 관리 상품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크다. 이는 단순한 보험을 넘어 사법 서비스 시장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개인은 소송 리스크를 더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데, 이는 사법 접근성을 높인다. 결국 더 많은 사람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 줄어든다. 이는 사회 전반의 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효과로 이어진다.

국가는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시장과 결합하면 부담을 분산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적 제도의 특징이다. 공공과 시장의 결합이다. 국가가 방향을 제시하고 시장이 이를 확장하는 구조다. 이런 협력 모델은 재정 부담을 줄이면서도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

해외 사례와 제도의 공백= 해외에서도 유사한 제도는 존재한다. 법률구조 제도, 소송 비용 보험 등 다양한 형태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판결금을 국가가 선지급하는 구조는 일반적이지 않다. 대부분은 비용 지원이나 리스크 분산에 머물러 있다. 즉, 판결 이후의 ‘결과 보장’까지는 제도가 확장되지 않은 상태다.

이는 아직 설계되지 않은 영역으로 공백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공백은 기회다.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법의 ‘집행 보장’ 영역은 국가가 상대적으로 늦게 접근한 분야다. 이 공백을 먼저 채우는 국가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은 이 영역에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설계의 선도다. 제도는 먼저 만든 국가가 기준이 되며, 후발국은 그 기준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의 시도는 단순한 정책을 넘어 국제적 기준 설정의 의미를 가진다. 제도 경쟁에서도 먼저 움직이는 국가가 주도권을 가진다.

정의는 결과여야 한다= 결국 이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다. 정의는 선언이 아니라 결과여야 한다. 판결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성된 정의가 아니다. 종이 위의 승소는 실제 삶을 바꾸지 못한다.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법의 권위는 결과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국가는 선지급의 효율성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영역에서 이 방식을 채택해 왔다. 이제 사법이 그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구조적 전환의 시점이다. 사법만이 예외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이제는 같은 원리를 적용할 때다.

이것이야말로 선진국의 조건이다. 정의가 작동하는 구조, 신뢰가 순환하는 시스템. 이것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국가가 완성되는 방식이다. 정의가 현실에서 구현될 때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신뢰 위에서 성장한다. 결국 강한 국가는 정의를 끝까지 책임지는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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