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자세한 건 니가 다음에 알아 봐. 하지만 확실한 건…일제 식민지 시대와 지금이 그리 크게 멀지는 않다는 사실이야.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자마자 곧장 미군이 밀고 들어와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를 내려 버리고 대신 미국 성조기를 올려 걸었다잖아.”
일장기 버리고
“그럼 태극기는?”
“모르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지…국민들 가슴속에서 피를 흘리며 나부끼고 있었을라나, 히히.”
“그렇구나. 난 일제 식민지 시대와 지금은 전혀 다른 먼 나라의 얘기인 줄 알았었는데….”
“나도 그랬어. 근데 백발 누님이 살아온 얘길 들어 보니까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기지촌의 양갈보가 한 여인의 삶 속에 같이 들어 있는 거야.”
“그 누님 연세는?”
“꺾인 백댓 살쯤.”
“뭐?”
“쉰다섯 살쯤이란 말이지.”
“말도 안 돼. 난 그 시대와 이 시대 사이에 깊은 강물이 가로질러 흐르는 것 같은데….”
“하지만 계산해 보면 사실인걸 뭐.”
청운은 침묵했다.
“앞으로 간혹 희망집에 가봐. 백발 할멈의 인생사도 기구하지만, 요일별로 구수한 된장찌개, 청국장, 김치찌개 따윌 먹을 수 있으니까 말야. 봄이 오면 싱그러운 나물 반찬도 많이 나올 거야.”
저쯤 기지촌 유흥가의 입구가 보였다. 지금은 낮이라서 조용하고 눈송이에 가려 언뜻 깨끗해 보이지만, 밤이 오면 온갖 소음과 현란한 불빛이 난무하며 허구의 성채를 쌓아 올리고 그 속에선 젊은 인간의 욕망들이 꿈틀거릴 것이었다.
둘은 찻길을 건너 골목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계속 걸었다.
깨진 콜라병과 빈 맥주 캔 따위가 나뒹구는 길은 환락의 밤거리보다 훨씬 더 을씨년스럽고 지저분하고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다.
건물의 시멘트 벽엔 조잡한 글씨로 낙서가 휘갈겨져 있기도 했다.
‘살인자는 리챠드! 잡아 죽이지 않고 뭐 하냐? 병신 같은 대한민국!’
‘그리운 안나…이 러브 유. 영원히….’
‘바기나는 똑같다. 양키 고홈!’
눈은 이제 그쳐 있었다. 낡았지만 기와지붕을 올린 꽤 넓은 한옥 한 채가 나타났다. 피에로의 뒤를 따라 청운은 그 집으로 들어섰다.
마당가에 큰 오동나무가 마른 잎을 두어 개 단 채 섰고 그 옆엔 오래 된 듯싶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가엔 아까 어떤 집에서 본 것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우물이 말랐는지 모르지만 펌프질을 해서 물을 퍼 여자들은 세수를 하거나 작은 빨래를 주물거리며 잡담을 하곤 했다.
검둥개 새끼 한 마리가 눈 쌓인 마당 한쪽을 뛰어다니다가 별 적의 없이 심심풀이로 짖어댔다.
“오요요~ 이리 온…눈이 내리니 동화 속에 나오는 강아지가 된 기분인가 보구나. 어서 형님한테로 와.”
피에로가 불렀으나 검둥이 녀석은 ‘뭔 개소릴 지껄여.’라고 생각하는 듯 힐끗 흘겨볼 뿐이었다.
“호호, 하두 허튼소릴 하니까 강쥐까지도 무시하는군.”
세수를 마친 여자가 머리에 묶었던 수건을 풀어 닦으며 이죽거렸다.
“헤헤, 누님과 누이들, 모두 안녕? 마침 만난 김에 내 아우 구름이를 소개할게. 앞으로 좀 잘 봐줘요. 순진한 애 물들이지 말고.”
피에로는 청운을 향해 찡긋 눈짓을 했다. 청운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시골 촌놈입니데이.”
그는 짐짓 능청을 떨었다.
“숫총각이야?”
밤이 오면 온갖 소음과 현란한 불빛
파마머리에 양돼지처럼 희멀건 안색
“몇 살인데 그래?”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열 살짜리 플레이보이도 있고 서른 살짜리 숫보기 총각도 있는 세상인걸.”
“겉으론 순진해 보이지만 속엔 능구렁이가 들어앉았는지도 몰라.”
그런 소리들을 늘어놓곤 여자들은 까르르 웃어댔다.
“어서 영업 나갈 준비 않고 무슨 새살을 그리들 떨어대!”
깊숙이 들어앉은 안방 쪽에서 뚱뚱한 한 여자가 대청 마룻바닥을 쿵쿵 울리며 걸어 나왔다.
혹시 옛날 같으면 현숙한 안주인이 버선발로 살몃살몃 나타나올 법도 했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뱀눈에 하이에나같이 야릇한 웃음을 입술 밖으로 흘리는 기분 나쁜 존재였다.
파마 머리에 양돼지처럼 희멀건 안색이었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듯 번쩍거리는 귀고리와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들.
“사장 부인인데 사실은 사장보다 더 높은 여자니 알아서 해.”
피에로가 청운의 귀에 살짝 속삭였다.
“누구야, 쟨?”
여자가 무슨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는 양 쌍을 잔뜩 찡그리곤 물었다.
“예이~ 마님, 이 총각은 제 의형제이면서 이번에 홀 보이 역을 맡겨 된 단역 배우입니다.”
“배우는 무슨…개소리 그만해, 욘석아!”
여자는 입귀로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래, 누구라구?”
“윤청운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해봐. 계집을 사악한 뱀으로 알고.”
청운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여자는 대뜸 신발을 꿰신곤 나가 버렸다.
“흥, 자긴 뭐 계집이 아니라는 말투군. 세상 여자가 다 남자로 바뀌어도 저 여자만은 아마 사악한 뱀으로 남아 있을걸.”
한 여자가 비웃으며 눈을 흘겼다.
“뱀보다는 왕거머리나 박쥐라고 하는 게 낫겠네. 아껴 모은 피를 빨아먹으니까 말야. 호홋.”
“쳇, 거머리만큼만 빨아먹으면 고마워하지. 하마는 물을 마시지만 그년은 우리 피를 몇백 도라무통이나 빨아 처먹고 있다니까.”
“한 사람을 두고 그렇게 욕을 하면 어떡하나. 세 사람이 입을 모으면 없던 귀신도 만들어낸다는데…싫든 좋든 그 왕마담 덕분에 살고 있으면서 뒷욕을 하면 안 되지.”
뚱뚱한 여자가 한 마디 했다.
“안 돼지든 된 돼지든 양돼지든 흑돼지든 결국 같은 소리지. 꿀꿀…그냥 먹고 살면 돼지지롱, 호호호”
머리를 다 감은 아가씨가 하얀 수건을 풀어 슬슬 닦으며 뇌까리곤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열어 놓은 채 화장대 앞에 앉아 분홍색 루주를 꺼내 입술에 바르기 시작했다.
방안에 놓인 자개 장롱과 침대 모서리, 전축 위에 놓인 꽃병 따위가 거울에 비쳐 반쯤 보였다.
성조기 올리다
‘저 동백꽃은 과연 생화일까 조화일까?’
청운은 꽃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야, 그만 가자.”
피에로가 말했다.
“응.”
청운은 뒤따랐다. 뒷문을 통해 어둑한 복도를 한동안 걸어가자 갑자기 현란한 불빛의 일부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피에로가 문을 열었다.
홀 천정에 달린 미러볼이 빙글빙글 돌며 오색 칠색의 무지갯빛을 뿌리고 있었다. 청운은 주춤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