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구름아, 방랑벽을 잠시 멈추고 여기서 살아보지 않을래?”
“형한테 붙어 벼룩새끼처럼 피를 빨아 먹으라구?”
“그건 아니지. 일을 해서 니 입은 니가 먹여 줘야지.”
“어떤 일인데?”
“까라면 까야지, 특수부대원이 지 하고 싶은 일만 하냐?”
파랑새 날개
“그래, 알았어. 형을 믿고 무슨 일이든 할게.”
“아까 그 블루문 클럽에서 홀 보이를 구하고 있어. 미안하지만, 최하층 노동자라고 생각하면 돼. 청소와 잡일을 비롯해 심부름 따윌 하는 거지.”
“참 좋은 곳을 소개시켜 주는군.”
“야 이 자식아, 그럼 흙수저가 밑바닥부터 기어야지 별 수 있냐? 히히 하지만 미국과 미군을 몰라서는 이 한국이란 나라와 사회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것 같아. 어쩔래?”
청운은 망설였다. 그 야릇한 기지촌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일렁이긴 했지만, 일단 응낙하면 마음속에 깃든 파랑새의 날개가 꺾일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서울로 가더라도 까마득하긴 해.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 보려고 애쓰다가 혹시 아스팔트 위의 비둘기처럼 날개가 부러지거나 다리를 절뚝거리는 꼴이 될 수도 있어.
더군다나 경찰이 일거일동을 주시한다는 얘기도 있으니 새장 속 참새만큼 답답하지 않을까 싶군. 차라리 한동안 여기 박혀서 재충전하는 것도 괜찮을 듯해.’
청운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피에로에게 물었다.
“형,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되네.”
“처음부터 잘하는 놈이 어디 있냐. 처음엔 고롭겠지만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길 거야. 하다 안 맞으면 때려치더라도 하는 데까진 바락바락 해보자구. 너도 나도….”
“응, 그래. 형을 보니 정말 좋아.”
둘은 건배를 하고 마지막 잔을 비웠다.
피에로는 방바닥에 드러눕자마자 곧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청운은 바깥에서 불어대는 삭막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 눈을 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난 둘은 서둘러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흐린 하늘에서 눈발이 바람에 날리며 차츰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곤 했다.
피에로는 하품을 하려던 입으로 하얀 눈송이를 받아먹으며 히히득거렸다. 마치 과거나 미래는 모르고 현재만 아는 아이 녀석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겠지만…피에로 형은 결코 순진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야. 저것은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연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배우가 되기까지는…꿈과 현실이 뒤섞여서….’
청운은 생각하면서 피에로의 뒤를 따라 걸었다. 피에로는 음유시인인 양 조용히 중얼거렸다.
황량한 논밭이 눈발에 조금씩 덮이고 있었다. 오솔길을 벗어나 신작로로 들어서자 피에로의 발걸음이 좀 빨라졌다. 청운은 절룩절룩 따랐다.
눈발에 묻혀 그런지 아직 뚜렷이 드러나는 건 없지만, 어젯밤에 본 클럽 거리의 풍경이 떠올라 갈수록 도발적이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오는 듯싶었다.
“히히히”
문득 이상스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청운은 고개를 들었다. 저쪽에서 한 여자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노란 종이꽃 같은 걸 달고 입속으로 이상야릇한 소릴 중얼거리고 있었다.
원래는 하야 빛깔이었으나 더럽혀진 블라우스 위에 눈송이가 내려앉아 더 누추해 보였다. 찢어진 치마 아래 낡은 보라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치마가 팔락팔락 날리며 허연 맨살을 드러냈다. 봄옷 속으로 겨울 추위가 매섭게 스며들 텐데도 천연덕스러웠다. 퍼르스름하게 질린 입술로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그 바닥서 꽤 인기 있는 양공주
미군과 살림 차리고 처참한 죽음
그녀가 몇 걸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청운은 속으로 뜨끔 놀랐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선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 참, 가슴 시리게 애잔스런 모습이로군. 그 곱던 아가씨가 어찌 저렇게….”
피에로가 한숨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여자는 살포시 눈웃음을 치며 다가섰다.
“함께 가시겠어요? 두 분 다 만족시켜 드릴게요. 히히히”
피에로가 머금고 있던 한숨을 내쉬자 여자는 하늘을 쳐다보며 스쳐갔다.
“아는 여자야?”
청운이 물었다.
“알아 봤자 얼마나 알겠어. 사연이 기구하더라만…다 남한테 들은 얘긴걸.”
“무슨 사연인데?”
피에로는 고개를 돌려 눈발 속으로 허청허청 사라져 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꽤 인기 있는 양공주였다나 봐. 공주처럼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저 먼 섬마을 고향의 병든 홀어미와 어린 동생들을 구하려 하다 보니 슬픈 양공주가 되었대. 여긴 아마 대한민국 전체보다 더 많은 기구한 사연들이 모여 있을 거야. 그건 니가 천천히 알아보면 실감이 날 테고…아무튼 저 여잔 어느 미군 하사관과 살림을 차렸는데, 예전에 청계천변 공단에서 기계인간처럼 고생할 때 오빠 동생 하며 사귀던 남자가 불쑥 나타났더래. 저 여자…지금 눈송이를 쳐다보며 깔깔거리고 있는 저 여자는…그 남자가 노동운동을 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 죽은 줄 알았대나 봐. 귀신 만난 듯 서로 끌어안고 우는데 동거남인 미군이 들이닥친 거야.”
피에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청운이 재촉하듯 물었다.
“조선 사람의 그 슬픈 눈물의 뜻을 미군 놈이 어찌 알았겠냐? 오해하거나 무시했는지 모르지만 대검으로 난자해서 죽이고야 말았어. 혹시 한 마리의 동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여자도 많이 맞았다고 하더군. 머리채를 잡고 기둥에 쿵쿵 찧어 기절해 버렸대. 죽지 않고 저렇게 사는 걸 과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름다울 미(美)의 미국이 아니라 미친 미국 놈들이네.”
“암튼 추억 속의 옛 한국 애인은 죽어 버리고, 잠시나마 믿고 기대던 미국 놈은 도망쳐 버렸으니…제정신이라 한들 저 여자의 심정이 어떻겠어.”
콘크리트 다리 밑의 흐린 강물을 바라보던 청운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 여인은 눈송이를 하얀 나비로 착각했는지 잡으려 하며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가자. 늦겠어.”
피에로가 재촉했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형, 대체 미군들은 왜 그다지 한국 여자들을 잔인하게 다룰까.”
“아마, 한국 남자들이 시시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그 미군 놈이 이국의 동거녀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아니, 애정은 아니더라도 성욕을 만족시키는 인형이나 암캐로 여기지 않았다면…조금이라도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면…인생의 사연이라도 한번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냐?”
“흠…”
흉악한 사실
“그 살인자는 경찰의 추적도 받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부대로 숨어 들어가 있다가 아름다운 나라인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겠지. 흐흐흣.”
“구름아, 너무 흥분하지 마라. 앞으로 이곳에서 살다 보면 더 흉악하고 억울한 사실들을 자주 보게 될 테니….”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